1923년 주민 대다수가 사회주의자였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14세 생일을 불과 1주일 남짓 앞둔 소년 피터 드러커는 사회당의 청소년단에 가입했다. 입단과 동시에 그에겐 가장 어린 동지의 자격으로 국경일인 11월11일 ‘공화국의 날’ 가두행진 때 붉은 깃발을 들고 행렬의 가장 앞에 서는 영광이 주어졌다.

1918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하고 공화정이 선포된 것을 기념하는 이날 빈에선 공산화된 러시아의 ‘노동자의 날’ 행사보다 앞서는 인류 최초의 자연발생적 시위가 벌어졌고, 이 시위는 나중에 히틀러와 스탈린에 의해 모방되며 20세기 독특한 대중예술의 형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이날 12열 종대의 맨 앞에서 빈의 대로를 행진하던 드러커는 도중에 자신의 뒤를 따르던 덩치 큰 의대생에게 깃발을 넘기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지난밤에 내린 비로 도로에 생긴 물웅덩이를 돌아서 가려고 했지만 군중들에 의해 원치 않는 방식을 강요 당한 게 싫었기 때문이다.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 즉 거대한 인간집단의 압력이자 집단운동의 물리적 위협에 압도 당하면서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거라던 바람과는 달리 드러커는 자신이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던 것이다. 또 이 사건으로 드러커는 자신이 타고난 ‘구경꾼’이란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현존하는 최고의 경영학자이자 미래학의 대가인 드러커(96)의 유일한 자서전으로 알려진 책은 사실 저자가 구경꾼의 입장에서 자신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영국에서 출판된 책의 부제목인 ‘내 생애의 다른 사람들’이란 데서 나타나듯, 저자 자신에 대한 내용은 없지만 할머니 등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본질과 분위기. 느낌을 전달하는 독특한 형식과 구성이 돋보인다. 사실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 유명인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도뿐이다.

저자의 일생에 각인된 사람들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인 만큼 각각의 이야기도 서로 연관성이 없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 모습이나 미국에서 뉴딜 정책이 집행되던 시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권리 등 20세기 전반기의 사회상을 어떤 역사책이나 문학책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평범해 보이는 인물에서 위대한 점을 발견하고 프로이트처럼 유명하고 대단한 인물에게서 허점과 오류를 찾아내는 드러커의 사람과 사물에 대한 식견이나 문필가를 빰치는 서술로 이 책은 독자들로부터 드러커의 어떤 저서보다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책의 첫번째 이야기 대상은 할머니다. 그는 빈에서 공무원인 아버지와 의사인 어머니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드러커를 다방면에 박식한 르네상스 지식인으로 키우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 준 유쾌한 사람이었다. 자동차 사고로 죽기 직전 자신을 친 운전사가 병원으로 모셔다드리겠다고 하자 “당신 차에 낯선 여자가 타고 있으면 당신의 명예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며 앰뷸런스를 불러달라고 말할 정도였다.

부모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프로이트에 대해, 저자는 그가 평생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반유대주의로 고통을 받았으며 빈 의학계가 그를 무시하고 경시했다는, 영어권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3가지 사실이 모두 완전한 허상이라고 지적하며 현실의 프로이트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강조할 때마다 거론되는 영국 신사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영국 몰락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됐다는 드러커의 분석도 흥미롭다.

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사회주의자인 트라운 트라우네크 백작의 이야기를 하며 드러커는 영국의 몰락이 1차 세계대전을 통한 지도층의 전멸과 생존자의 의욕상실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신사도에 얽매이지 않은 다른 나라의 지도층과 달리 영국은 교육받은 젊은 장교들의 사망률이 유독 더 높았다는 것이다. 이밖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초월한 제3의 길을 꿈꿨던 폴라니 가족과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의 외교정책을 사실상 입안한 프리츠 크레머, ‘타임’ ‘포천’ ‘라이프’ 등을 창간한 미국 잡지계의 대부 헨리 루스,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예언자인 버크민스터 풀러와 마셜 맥루한, GM을 세계 최대 기업으로 키운 앨프레드 슬론 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책은 무엇보다 드러커 경영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본질은 바로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다. 14세 때 빈에서의 가두행진에서의 경험이 보여주듯 전체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던 1930~40년대 청년시절을 보낸 드러커는 그 누구보다도 기업 경영에 있어 집중화와 획일화를 거부하고 상이성과 다양성을 강조해왔다. 드러커는 “나는 인간이 다양성과 다원성을 가지며,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독창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며 “이미 50여년 전에 나온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내 모든 책 속에 내재돼 있는 핵심은 바로 이런 신념이다”라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 이동현 옮김.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