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비교철학의 대가이지만 5공화국 때 잠시 정치에 나선 탓에 국내 철학계에선 비주류로 일관했던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김형효(65) 교수가 31일 정년퇴임한다. 지난 26일 연구원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철학’이란 제목으로 고별강연을 가진 김 교수를 27일 연구실이 있는 북재(北齋)에서 만났다.

1980년대 말 연구원에 복귀한 다음 매일 오전 9시30분쯤부터 오후 7시 너머까지 머물며 ‘데리다의 해체철학’ 등 무려 18종(공저 4종 포함)의 저서를 잉태한 사색과 저술의 공간이었던 그의 연구실 책상 앞에는 입적한 청화·숭산 스님의 사진 등이 걸려 있었다. 젊은 시절 실존주의와 현상학에서 출발한 뒤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해체주의)를 거쳐 하이데거와 노장불교로 철학적 사유의 범위를 확장시켜온 김 교수는 최근 몇년 동안 매주 일요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금강선원에 나가 자신의 철학의 종착역으로 삼은 불교의 ‘반야지혜’를 얻기 위한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다.


―단순히 덕담 수준의 인사치레가 아닌 본격적인 자신만의 철학적인 얘기를 담은 정년 고별강연 내용이 참석자들로부터 신선하다는 반응을 받았습니다.

“기존 일반철학과는 다른 담론을 얘기했기 때문이겠지요. 과거 한국철학은 세계철학의 일반적 추세처럼 구성주의적 철학사상 위주였어요. 구성주의적 철학사상은 (우파적) 경제실용주의와 (좌파적) 도덕명분주의로 대별됩니다. 전자는 현실주의의 경향을 띠고 있고, 후자는 이상주의적이라 할 수 있어요. 전자는 세상에 편리의 상징인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 왔고, 후자는 정의의 상징인 도덕정치로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려고 기획해 왔습니다.

그러나 전자의 현실적 편리만큼 후자의 이상적 정의가 착근되지 않았고, 구악이 일소되면 신악이 다시 등장하는 조짐이 반복되어 왔지요. 이제 인류는 재래의 구성주의의 철학으로서는 세상이 구원받지 않음을 알게 됐습니다. 가난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실용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이기심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도덕명분주의의 정의의 이상을 존중하되 독선적 위선적 명분의 허상을 숭상하지 않는 제3의 길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 제3의 길이 제가 고별강연에서 말하려고 한 해체적 사유이며 바로 동양의 노장과 불교사상의 마음공부와 연결되는 것이지요.”

―노장과 불교사상을 21세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유로 보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노장학과 불교는 무위(無爲)의 사유를 강조합니다. 무위의 사유는 능위(能爲)의 사유와 달라서 세상을 인간중심으로 개조하거나 조작하려는 모든 기도를 거부하지요. 무위적 사유는 무위도식하는 것처럼 게으른 사유가 아니라, 자연적이며 마음의 자발적 흐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스런 것을 좋아하지 반드시 옳다고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노장과 불교의 사유는 도덕적 의(義)보다 마음이 자연적으로 따르는 이익을 진리로 여겨요. 이익을 진리로 여기지만 경제실리처럼 이기배타적 이익추구가 아니라, 마음의 자리를 바꿔서 자리이타적(自利利他的)인 이익을 분비하기를 종용하지요. 그러므로 노장학과 불교가 더 실질적으로 좋은 세상을 이룩하는데 실효성이 있다고 봅니다.”

―동서철학을 모두 섭렵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처음에 현상학과 실존주의로 철학에 입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 철학이 의식의 철학인데, 의식의 현상과 실존의 사유가 침투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구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예컨대 관상과 사주팔자와 같은 것은 실존주의와 현상학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조주의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오히려 지배당하고 있는 구조로 언어와 문화, 역사, 무의식 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구조주의가 너무 형해화된 구조의 뼈대만 보지 살과 피를 가진 생명의 역동성이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다시 후기구조주의인 해체주의로 나아갔습니다. 귀국해서 서울대 은사인 박종홍 선생님의 영향으로 민족중흥의 철학을 위해 동양철학, 특히 유학을 공부하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나 ‘내성외왕(內聖外王)’ 등의 유학사상에 대한 철학적 회의가 일어난 것도 해체주의로 넘어가게 된 배경입니다. 이 과정에서 데리다의 해체철학에서 많은 것을 철학적으로 깨달았으며 노장사상과 불교철학을 데리다가 말한 해체적 차연(差延)의 철학으로 읽어야만 모든 의문이 풀린다는 것을 느꼈어요.

아울러 그동안 어려워서 손도 못대었던 하이데거의 철학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의 구조가 원초적으로 이중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해체적 사유/구성적 사유’, ‘소유론적(존재자적) 사유/존재론적 사유’ 등이 바로 그것이지요. 세계 철학사를 이 두가지 철학소(素)의 새끼꼬기로서 읽으면 동서고금의 철학사가 환히 눈에 보입니다.”

―우리 지식인 사회를 풍미했던 진보적 가치관과 거리를 두었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도덕주의적 성향이 짙어서 좌파적 의식이 비교적 강한 프랑스 철학의 일반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저는 좌파적 철학의 성향에 거리를 두게 한 두 스승의 철학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두 스승은 실존주의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과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입니다. 전자로부터 저는 역사현실에서 인간의 철학적 사유가 ‘추상의 정신’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추상의 정신’은 인간의 사유가 현실의 구체적 맥락과 여건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어떤 추상적 관념을 절대시하여 거기에 얽매여서 그 추상적 가치에만 경도되는 것을 말하지요. 또 메를로 퐁티로부터 저는 역사현실이 늘 애매모호하여 선악을 흑백으로 잘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현상학적 인식법을 익혔습니다. 저는 그런 스승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세상에 대한 판단을 흑백으로 나누어 보는 사고를 경계했고 늘 이중적인 사유로 세상보기가 더 실질적이라고 여겼지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앞으로 저는 앞에서 기술한 미래적 사유의 정신에 따라 무아의 길로 접어드는 길닦기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익히고 배우기 위해 모든 만물은 본질적으로 서로 연관돼 있다는 연기법(緣起法)적 사유, 즉 차연의 철학에 몰두할 생각이에요. 일차로 원효사상을 차연의 철학으로 해석하는 원고를 완성하고 이어서 참선공부에 몰입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오면 고요히 거기에 상응하기 위해 마음의 수행을 쌓아 나가겠습니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