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작가 실비나 오캄포(1903~1993)는 그의 문학적 동료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리고 남편이자 역시 문학적 동료였던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와 함께 중남미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꼽혀왔다. 그래서 오캄포의 단편집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는 우선 반가운 책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면서도 중남미 대표 단편집같은 책에 그저 한두 편씩 들어있는 것이 전부였던 그의 작품 세계를 처음으로 온전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캄포의 단편집은 이같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독자들을 지극히 불온한 낯선 세계로 데리고 간다. 그는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현실과 일상의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 느닷없이 공포스러운 상상력, 잔혹한 충동, 불합리한 사건 등을 언뜻 언뜻 드러내다 순식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질서를 뒤집어버린다. 따라서 18편이 묶인 이 소설을 읽다보면 독자들은 현실에서 출발해 어느새 낯선 세계에 가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반복되는 열여덟번의 체험을 하게된다.

표제작인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보고서’는 이같은 작가의 세계관이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제목처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보고서 형식으로 이뤄진 소설에서 천국과 지옥은 선함과 악함의 상징적 공간이 아니라 그저 똑같이 거대한 경매장이며, 천사와 악마 역시 똑같이 탐욕스러운 존재다. 사람이 죽으면, 변장한 천사와 악마가 나타나 사람을 온갖 물건이 쌓여있는 경매장같은 천국과 지옥의 회랑으로 데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게 한다.

사람은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지옥이나 천국으로 가게되는데, 정작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아무런 법칙이 없다. 그저 우연과 천국과 지옥의 변덕에 의해 이뤄질 뿐이다. 이 때문에 망가진 열쇠나 버드나무 새장 때문에 지옥에 간 사람도 있고, 신문지 한장이나 우유잔 하나 때문에 천국에 간 사람도 있다. 이렇게 작가는 세계를 현실과 환상, 논리와 비논리, 필연과 우연, 정상과 비정상처럼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곳으로 파악해 내보인다.

그래서 소설집 속에서는 멋지고 아름다워보이는 벨벳 드레스가 그 드레스를 입고 있는 사람의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하고(벨벳드레스), 밧줄이 자신을 애지중지해주던 주인을 살해하기도 하고(밧줄), 요술 펜이 주인을 바꿔가며 위대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요술 펜). 인간의 행동뿐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과 대상 역시 이성적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 몇편의 소설은 어린이와 여성은 순진무구하고, 약한 존재라는 기존의 관념을 깨트리고 어린이들은 오히려 어른들을 억압하는 사악한 존재로 묘사하기도하고, 여성 역시 잔인하고 파괴적인 본능을 드러내는 인물로 그리기도 한다.

최현미기자 c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