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이 한국 경제를 자꾸 먹어 들어오고 있다. 이대로 가면 곧 한국 경제 절반이 스러질 것이다. 사람들이 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가.”

최종현(전 SK그룹 회장)이 병상에서 말기 폐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마지막까지 절박하게 되뇌었던 말이다. 한반도에 외환 위기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직전인 1997년 초. 최종현은 산소호흡기를 단 채 두 차례 청와대를 찾았다.

“지금은 경제 위기입니다. 국가 비상 사태입니다. 긴급 조치를 취해 주십시오. 임금을 5년간 동결시키고 금리를 국제 금리 수준 이하로 내려 주십시오. 이걸 못하는 정책 담당자들은 다 물러가라고 하십시오.” 죽음을 목전에 둔 재벌 회장의 읍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 생전에 한국을 세계 일등 국가로 만들겠다는 최종현의 꿈 역시 이루지 못한 유언으로 남고 말았다.

최종현은 암과 싸우면서 지인들에게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의 꿈은 살아 생전에 한국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 6만달러 이상 가는 초일류 선진국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집단을 일군 그였지만, 최종현은 회사를 생각하기에 앞서 나라를 생각했다. 너나 할 것없이 배고팠던 보릿고개를 경험한 그에게 ‘부국(富國)’을 향한 일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SK그룹이 본 궤도에 올라선 후 최종현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1994년 한국 최고의 경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경제학 한국화 모임’을 만들었다. 한국 경제를 세계 초일류 수준으로 발전시킬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싱크탱크(Think Tank)’였던 셈이다. 참여 멤버는 송병락 서울대 교수, 김수용 서강대 교수, 안충영 중앙대 국제대학원장, 이영선 연세대 교수, 이재웅 성균관대 부총장, 이종윤 한국외대 교수, 최광 전 보건복지부 장관,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등 한국 경제학계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시작했습니다. 대기업 회장이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나, 한번 들어보자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한번, 두번 모이다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오전 11시30분에 시작한 토론이 저녁 5시, 6시까지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최 회장은 토론이 심도있게 진행될 때면 환한 표정으로 허벅지 안쪽을 연방 쓰다듬곤 했습니다. 기분이 아주 좋을 때마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습관이었죠.”(송병락 서울대 교수)

최종현은 거의 매일 이들을 돌아가며 집무실로 초빙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미국식도 일본식도 아닌 한국만의 고유한 성장 모델을 만드는 것이 토론의 목적이었다.

최종현은 경제학 한국화 모임을 통해 자신이 구상해온 한국 사회 개혁을 위한 아이디어를 봇물처럼 쏟아냈다. 때로는 참신하고, 때로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아이디어들이었다.

“한국에 제일 좋은 것은 작은 정부를 만드는 길입니다. 내가 보기에 공무원 수를 10분의 1로만 줄이면 봉급을 4~5배 올려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국가 재정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공무원들에게 봉급을 적게 주면 부정 부패 행위를 합니다. 부패한 공무원은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부의 능률을 크게 떨어뜨리게 되는 것입니다.”(1997년 10월 모임에서)

기업에 대한 행정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지만 최종현의 발언에는 거침이 없었다. “한국 경제가 고비용·저효율의 악순환에 빠져있는 것은 정부 규제 때문이다. 규제를 대대적으로 완화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규제완화기구가 있어야 한다. 그 기구에는 공무원들이 들어가서는 안되고 그들의 입김조차 들어가면 안된다. 규제를 만든 사람에게 규제를 완화하라고 하는 건 말이 안된다.”

최종현은 서구식 사회 복지의 허상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일침을 가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가난한 사람에 대한 분배는 불가피하게 가난을 면키 어려운 사람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젊으면서도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소득 재분배를 하면 안된다. 왜 죽자 사자 열심히 일해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고, 게을러 빠져 가난한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야 하는가.”

시대의 대세였던 누진세 제도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비례세 제도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발언이다. 반기업 정서가 한창 확산되고 있던 당시였다. 최종현의 주장 중에는 시시비비를 떠나 대기업 회장으로서 감히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현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부의 국가 경영 방향’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만들어 청와대로 보냈다. 궁극적으로 나라 발전에 보탬이 된다면 ‘괘씸죄’ 따위는 상관할 바 없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그러나 최종현의 주장은 대부분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외환 위기에 대한 절박한 경고는 묵살됐고, 규제 개혁에 대한 소신은 ‘밥그릇 챙기기’로 치부됐다. 그가 ‘재벌 회장’이라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국가 경제의 한 축을 이루는 대기업을 일궜지만, 그의 이러한 업적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것이다. 최종현이 여생을 바쳐 기획한 ‘국가 개혁 프로젝트’중에는 그가 ‘SK그룹 회장’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내용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겠다는 꿈이었다. 최종현은 자신이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인재 풀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대학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같은 일류 대학을 키우려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만큼 민간 기업이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꿈은 ‘재벌 기업은 대학을 운영할 수 없다’는 정부 원칙에 부딪혀 무산됐다.

“최 회장께서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97년쯤으로 기억됩니다. 저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송 교수, 정부에서 이제야 나한테 대학을 운영해 보라고 하네. 그런데 내가 이제 내 몸도 추스르기 힘든데 어디 할 수가 있겠어. 너무 늦었어.’ 순수한 마음으로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겠다는 꿈을 결국 그렇게 접은 거죠.”(송병락 서울대 교수)

수돗물의 수질이 한창 문제가 될 무렵, 최종현은 정부에 “민간 자본으로 설악산 청정 계곡의 물을 파이프로 끌어와 서울 시민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페놀 사건이 터졌을 때는 수 천억원을 조건없이 투자해 부산의 수질 개선 사업을 대신 해주겠다는 제안을 냈다. 국민이 먹는 물을 이대로 놓아둘 수 없다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이 역시 최종현이 ‘대기업 회장’이라는 이유로 벽에 부딪혔다. “재벌이 물 장사까지 하려고 한다”는 비아냥이 터져나왔고, 정부는 “뜻은 고맙지만 개인이 대주는 물을 부산 시민이 먹을 수는 없다”는 이유로 그의 제안을 끝내 외면했다.

송병락 교수는 그가 지켜본 최종현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경제학 한국화 모임때마다 항상 토론 내용을 녹취해 뒀는데 요즘 다시 들어보면 돌아가시기 2~3년 전부터는 최 회장 목소리에 유독 화난 기운이 많았습니다. 저에게 ‘요즘은 양주 반 병을 안 마시면 잠을 못 잔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어요. ‘요즘 정치 자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1000만원 짜리도 안되는 것을 들고와서는 10억원을 내놓으라고 해’하면서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는 사회 정서를 걱정하셨죠.”

최종현은 외환 위기가 마침내 현실로 다가온 1997년말, 병상에 누워 마지막으로 한국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견해를 원고로 정리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사람들이 국가 발전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가져주길 바라는 일념에서였다. 경제학 한국화 모임 멤버들은 최종현이 1998년 8월 세상을 뜬 후 그가 병상에서 집필한 원고를 모아 유고집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을 펴냈다. 그리고 책의 첫장에 다음과 같은 서문을 실었다.

“최종현 회장은 합리적이며 실천적인 성격이었고, 그가 제시한 의견 중에는 대담한 구상을 담고 있는 것이 많았다. 독자들이 공감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그의 유고를 출간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지난 30년간 보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21세기의 중요한 정책 과제를 여러면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방향은 우리가 당면한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 경영의 기틀을 다지는 데 그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유고가 먼 훗날까지 후세들에 의해 많은 토의가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최종현 회장을 추모하는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