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세계체제론자인 저자가 2001년 9·11사태를 중요 계기로 삼아 미국 헤게모니의 부상과 몰락의 역사적인 궤적을 추적한 글을 모은 것이다. 미국이 1970년대 이래 하나의 세계적 권력으로서는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고 보는 저자는 베트남 전쟁과 68년 혁명, 89년 베를린장벽 붕괴, 9·11사태 등의 4가지 역사적 상징을 통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체제 내의 패권국가 자리를 놓고 19세기 말부터 독일과 경쟁을 벌였던 미국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후계자로 부상한다. 1·2차 세계대전을 묶어서 미국과 독일이 1914년부터 1945년까지 벌인 하나의 지속적인 ‘30년 전쟁’으로 봐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이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 옛 소련이 세계의 3분의 1을, 미국이 나머지를 통제하는 상태를 유지키로 한 얄타회담의 암묵적 합의에 따라 전후세계를 관리해온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치르느라 금 보유고가 거의 바닥이 나면서 세계경제에서 두드러진 지위가 끝장이 나고 말았다. 때맞춰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가 도약하면서 3자가 거의 경제적으로 동등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68년 혁명은 직접적인 정치적 결과는 크지 않았지만 지정학적·지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미국이 소련과 공모해 세계질서를 구축한 토대였던 얄타협정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당시 전지구적 이데올로기였던 중도파 자유주의의 지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동유럽의 붕괴는 얄타체제의 청산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적수가 사라지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할 근거를 잃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에 9·11사태는 냉전 이후 더욱 심화된 미국의 쇠퇴와 허약성을 보여주는 최종적인 상징적 사건이었다.

‘근대세계체제’ 등의 저서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저자는 9·11사태가 미국 군사력의 한계와 세계의 뿌리 깊은 반미감정, 90년대 경제호황이 낳은 후유증, 미국 민족주의의 모순, 미국의 시민적 자유전통의 취약성 등 오늘날 미국이 처한 5가지 현실을 직시하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런 현실은 미국의 정치인들이 즐겨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 즉 모든 사람이 저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최대치를 성취하며 안락한 삶을 보상받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환상을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이 모순을 날로 악화시키고 있는 부시행정부의 정책들이다. 미국이 자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방식을 비판하며 반성을 촉구한 저자는 이를 위해 책에서 20세기, 지구화, 인종차별주의, 이슬람, 타자들, 민주주의, 지식인 등 오늘날 정치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향후 10년 동안에 전개될 격심하고 갑작스러운 변화 중 하나로 한반도 통일을 들고 있는 책은 미국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한기욱·정범진 옮김.

최영창기자 yc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