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축국(五天竺國·인도) 법에는 목에 칼을 씌우거나 매질을 하거나 투옥하는 일이 없다. 죄를 지은 자에게는 죄의 경중에 따라 벌금이나 물리지, 형벌이나 사형을 내리는 일은 없다. (…) 길은 많은 도적들로 득실거리지만 그들은 물건만 빼앗고는 곧 놓아주며 해치거나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물건을 아끼다가는 곧 바로 다치기 일쑤다.”

1200여년전인 723년부터 727년까지 인도를 비롯한 서역 일대를 여행한 신라 고승 혜초(704?~780)가 남긴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서 인도의 풍속을 기록한 내용이다. 인도(천축)를 동서남북과 중간 지역 등 5개로 나눠 5천축으로 나눠 소개한 최초의 여행기이기도 한 책에서 혜초는 석가의 탄생지인 가비야라(현 네팔의 룸비니)와 열반처인 구시나(현 카시아)가 황폐화돼 승려조차 없을 정도로 불교가 쇠잔해버린 현실을 목도하고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바로 ‘오천축을 다녀온 기록’이란 뜻이다. 흰두교가 교세를 확장하면서 초기 불교의 요람인 동천축과 중천축은 말할 것도 없고 남천축과 서천축에서도 외도(外道)가 성행한 것이 8세기 전반 인도의 상황이었다. 반면, 돌궐을 비롯한 호족들의 치하에 있는데다 대식(아랍)의 침입을 받아 일부 지역이 절반이상 파괴됐던 건타라(간다라) 등 북천축과 중앙아시아지역에선 오히려 ‘일시적 부흥’으로 불릴 정도로 불교가 활성화돼 있었던 저간의 사정을 이 여행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역주한 책이 새삼 관심을 끄는 것은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풍습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란 내용 외에도 기존의 번역서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차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깐수 교수’로 널리 알려진 역주자(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는 동서문명교류학과 이슬람학의 대가답게 정확한 번역을 토대로 원문 분량의 약 10배에 해당하는 503개의 자세한 주석을 붙인 제대로 된 역주서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고 있다.

사실 ‘왕오천축국전’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불과 96년 밖에 안된 일이다. 1908년 3월 프랑스의 동양학자이자 실크로드 탐험가인 폴 펠리오(1878~1945)가 중국 둔황(敦煌)석굴 17동에서 제목도 저자명도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없는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하기전까지 ‘왕오천축국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실물도 전하지 않았다. 물론 펠리오 자신은 이 책을 발견하기 전부터 당나라 승려 혜림이 지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전100권, 783~810년 편찬)란 저술을 통해 이 여행기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그는 일종의 불교관련 서적 어휘 주석집인 ‘일체경음의’제100권 ‘혜초왕오천축국전’편에 주석된 85개의 어휘 중 일부가 자신이 발견한 두루마리에 있는 어휘와 일치하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이 두루마리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처음 인도에서 온 밀교승 불공의 제자라고만 알려져 있던 혜초가 신라출신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은 두루마리가 발견된 지 7년 뒤인 1915년 일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연구에 의해서였다.

역주자는 책의 앞에 붙인 80여쪽에 달하는 해설을 통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등과 함께 ‘세계 4대 여행기’중의 하나로 꼽히는 ‘왕오천축국전’의 발견경위와 그동안의 연구사는 물론, 혜초의 서역기행 노정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가로 42㎝, 세로 28.5㎝의 종이 9장을 이어붙인 것으로 총 227행에 5893자가 필사돼 있는 현존 두루마리는 원래 ‘왕오천축국전’이 상·중·하 3권으로 돼 있었다는 혜림의 ‘일체경음의’의 기록이나 이 책에 주석된 85개의 어휘와 비교해 볼 때 필사과정에서 3권으로 된 원본을 요약한 절략본(節略本·축약본)이란 것이 역주자의 판단이다. 언어표현이나 문법구조가 미숙해 펠리오로부터 “법현(의 ‘불국기’)과 같은 문학적 가치도 없고 현장(의 ‘대당서역기’)과 같은 정밀한 서술도 없다”는 평가를 받았던 원인도 여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저자의 변론이다.

이처럼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이 절략본에다 필사본이기는 하지만 8세기 후반 황마지(黃麻紙)에 쓰인 그대로 보존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책이란 점에 역주자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행기에는 실제 여행한 곳과 직접 답사하지 않고 전문(傳聞)한 곳에 대한 기록이 섞여 있기 마련인데, 역주자는 원문의 표현과 내용 분석을 통해 당시 혜초의 서역기행 노정의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해 남해 바닷길로 동천축에 이르러 육로로 인도와 서역을 돌아본 뒤 파미르고원과 카슈가르, 쿠차 등을 거쳐 당나라 수도 장안에 이르는 여정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특히 혜초가 서역 어디까지 여행했느냐는 것이 그동안의 논쟁거리였는데 역주자는 내용분석을 통해 페르시아와 대식(아랍)까지 실제 이르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 혜초가 방문한 대식국의 도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 호라산 총독부의 소재지인 니샤푸르(마슈하드)였다는 것이 역주자의 추정이다.

치밀하고 자세한 주석으로 1200여년전 여행기를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살려낸 역주자의 노고와 함께 고급 천으로 제본한 장정과 편집도 돋보인다. 디지털 복원 전문가인 박진호씨가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작업한 3차원 디지털 혜초 복원도 등도 눈길을 끈다. 최영창기자yc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