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전망대에는 지난 84년 9월 홍수 때 임진강 상류에서 떠내려 온 북한 여성의 브래지어 2개가 전시되어 있다. 강이 넘칠 때 브래지어가 떠내려 왔고 북한 아이들의 장난감과 양말, 모자, 장갑도 떠내려 왔다. 장난감은 나무를 칼로 깎아서 손으로 만든 권총이었다. 권총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나무토막이었다. 아마도 그 아이 아버지나 삼촌의 솜씨였을 것이다.

브래지어와 아이들 장난감이 떠내려 올 정도였으니, 상류 쪽 북한지역 산간마을이 물에 휩쓸려 가재도구가 모조리 흩어졌던 모양이다. 그 마을이 어느 마을인지, 누가 집을 잃었고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마을 여자들의 브래지어 두개는 아군 관측소에 전시되어 있다. 관측소를 지키는 장병들은 이 브래지어를 ‘노획품’이라고 불렀다. 노획된 브래지어 두개 중 하나는 출산을 경험하지 않았거나 가슴이 작은 젊은 여성의 것으로 보였고, 또 하나는 심한 가사노동이나 들일을 감당해야 하는 나이든 여자의 것으로 보였다.

젊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브래지어는 삼각형이었고 사이즈는 A컵 정도였다. 컵 위에 장미꽃 무늬가 돋을새김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컵 밑 선에 와이어 쓰지 않고 고무줄 끈을 댔지만, 고무줄 끈은 부드럽고 탄력이 좋아서 가슴을 받쳐 올려 주기에는 와이어 못지않게 조일 힘이 있어보였다. 삼각형의 컵 두개가 간격이 없이 한 개의 점에서 만나고 있었다. 이런 브래지어를 쓰면 가슴의 골짜기가 깊어 보이고 컵이 가슴을 2분의1이나 3분의2만 가리기 때문에 작은 가슴도 빈약해 보이지 않는다. 컵은 봉긋하지도 않았고 평면도 아니었다.

컵은 과장된 입체재단을 하지 않았고 패드를 붙여서 볼륨을 조작하지도 않았다. 이 컵은 작은 가슴의 밑 부분을 편안하게 받쳐주었을 것으로 보였다. 삼각형 컵의 꼭짓점에 어깨 끈을 매단 바느질 솜씨도 깔끔한 편이었다. 북한여성들은 중학교 때부터 제 손으로 브래지어 만드는 바느질 솜씨를 교육받는다고 들은 적이 있지만, 이 노획된 브래지어는 여자 가슴의 조형성을 이해하는 디자인 감각과 그 감각을 표현해낼 수 있는 기술을 갖춘 봉재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물건이 아닌가 싶었다.

나이든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브래지어는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쓰시던 통치마 말기와 닮아있었다. 컵이 따로 없고 넓은 천으로 가슴을 압박해서 등 뒤로 꽁꽁 묶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치마와는 분리된 별개의 란제리였고, 어깨 끈이 달려있는 점은 우리 어머니들의 치마말기와는 달랐다. 천은 두꺼운 면이었고 폭이 넓었다. 이런 브래지어를 쓰면 가슴은 납작하게 눌려서 윤곽이 들어나지 않지만, 흔들리지 않아서 힘든 일 하기에는 좋겠다.

낡은 브래지어들이었다. 오랫동안 살 속에 파묻혀서 등 뒤로 돌아가는 끈과 컵 밑 선은 솔기가 터져서 실밥이 흩어졌고, 흙탕물이 배어서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 낡은 브래지어는 나에게 성적존재로서의 북한여성을 처음으로 일깨워 주었다. 늘 한복을 입고 TV에 나와서 복받치는 혁명의 감격과 영웅주의적인 적개심으로 목울대를 떨면서 뉴스를 전하는 북한 여자 아나운서들이나 몇 년 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만경봉호를 타고 와서 꾀꼬리 창법의 노래와 학습된 미소를 보여주던 북한 여자응원단에게서 나는 아무런 인간의 개별성도 느낄 수 없었다.

아군 관측소에 전시된 북한여성의 낡은 브래지어는 살아서 가슴을 꾸미는, 성적인 여자의 체취를 풍긴다. 이 여자는 지난번 홍수에서 살아남았을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여자의 브래지어가 남쪽과 북쪽의 산하가 한꺼번에 내려다보이는 남방한계선 고지의 관측소에 개별적 여자의 존재로서 전시되어 있다. 여기는 철책선 밑이다. 내 자전거 핸들에 이 브래지어를 매달아 바람에 날리면서 경의선도로를 달려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젊은 주인에게 가져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