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100편의 사랑 소네트’를 읽은 날은 하늘도 높고 청명한 초여름날이었다.

‘당신 머리카락을 기릴 시간이 넉넉지 않다 /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자세히 말하고 그것들을 기려야 한다 /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면서 특별한 눈을 갖고 살고자 한다; /나는 다만 당신의 문장가이고 싶다.’

이 시집은 네루다가 세번째 아내 마틸레 우루티나와 살기 시작한 1955년 이후에 썼다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또 나는 그의 다음과 같은 시편 속에서 이 점을 거듭거듭 확인한다.

‘당신이 소금 장미나 황옥이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 불이 뿜어내는 카네이션 화살이었대도. / 어떤 숨겨진 게 사랑받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 / 은밀히, 그늘과 영혼 사이에서.’

어떤 사랑이 이보다 더 지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시집을 펼치는 순간, 이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 시인이고, 자신이 동조했던 칠레 아옌데 정부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던 주간에 타계한 바로 그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애써 떠올릴 필요가 전혀 없다. 시인이 타계한 지 벌써 30년이 가까워오지만 시인 네루다는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시는 부르면 가까이 와서 머무르는 법이니까.

나는 대시인들이 한결같이 노래하듯 인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몰두할 그 무엇이 있어서 좋았다. 이 시편들을 완전히 해독할 수는 없지만, 아마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읽는 그 순간 고양된 감정은 나의 일상에 지친 영혼을 위무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흡사 날카로운 그 무엇에 찔린 듯 놀라면서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곧추앉는다. 그리고 잠시 흐트러진 기를 모아 정면을 응시한다. 내 심상 속에 미당 서정주의 얼굴이 보인다.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꾸었던 로맨틱한 꿈이 그 순간 끝장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당이 타계한 지 1년이 훨씬 넘었지만 그의 삶과 문학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해서 증폭되는 느낌이다. 그 과정에서 일제를 찬양한 그의 시들이 발굴돼 독자들에게 소개됨으로써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미당이 속속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계속되는 논란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시대 최고의 한국시인으로 자리매김한 미당의 문학사적인 평가를 조정하는 의미(김동리, 황순원 등 대가와 함께 미당도 타계하면서 광복 이후 중요한 한 시기가 끝났다는 시간적 의미를 포함해서)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에 경도되었던 우리 문학의 경향이 이념적·관념적인, 또한 지적인 측면으로 균형감각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어주고 있다는 측면도 있다. 네루다를 읽는 시간에, 미당의 폐허가 된 집이 겹쳐 보인다. 그 집을 지키고 있는 개의 모습이 보이고 또 얼마전 미당의 친일시가 특집으로 실린 한 문예지의 표지가 보인다. 솔직히 미당이 네루다와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인이면서 시도 잘 쓴 시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미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논란은 앞으로도 쉼없이 계속될 것이다. 다만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함께 버려서야 되겠는가. 온갖 논란 속에서도 이미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미당의 시 ‘동천’, ‘푸르른 날’, ‘질마재 신화’, ‘상리과원’까지를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초여름날에 미당의 시를 소리내어 읽으며 고양된 감정에 휩싸이는 사람도 어딘가 있으리라. 그 순간 이념적 자기 검열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 전체의 불행이다. 네루다와 미당의 시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정은숙 출판사'마음산책'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