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한국지성’ 시리즈 마지막 순서로 소개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38)는 젊고 도전적인 학풍을 지닌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박사학위도 받기 전인 90년 10월, 27세 나이에 한국인 최초로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돼 화제가 됐던 그는 서구와 선진국 중심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의식이 반영된 도전적인 논문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산업정책의 정치경제학’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그의 박사논문은 경제학자들이 등한시했던 정치경제학적 방법론을 응용, 뚜렷한 이론 없이 주먹구구로 이해되던 동아시아식 선별적 산업정책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선진국은 자기들이 쓰지도 않은 정책과 제도를 후진국에 강요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하며 후진국의 시각이 반영된 경제학과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주요한 연구주제다. 각종 저널에 경제 현실에 관련한 시사적인 글들도 활발히 발표하고 있으며, 논문들은 멕시코, 스페인, 홍콩 등에서 번역되기도 했다. 장교수와 e메일과 전화인터뷰를 통해 공부하는 법과 세계경제를 바라보는 시각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벌써 12년째 교수생활을 하고 계시는군요.

“처음에는 박사학위도 다 끝내지 못한 어린 나이에, 게다가 영어로 강의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교수가 되어 고생도 많이 했죠.”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무엇보다 아직도 서구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인종차별주의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학계는 그래도 인종차별이 제일 덜한 사회이지만, 교수생활 초기에는 동양인에다 나이가 어리다는 점 때문에 한 수 깔고 대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점이 신경에 거슬려 토론장에서 할 말도 차분히 못하고 흥분한 적이 많았죠. 이제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나서 대개 적절히 대응하지만, 아직도 비서구인을 깔보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 지식사회의 문제는 자기 이론이 없다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자기 이론이 없다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현재 세계 학계를 주도하는 영미국가, 특히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 문제입니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 그나마 자기 이론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나라들도 현재 주도권을 쥐고 있는 영미학계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론을 번역 소개하지 못해 그나마 이뤄놓은 것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나라들에서도 점차 미국이나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온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현재 영미학계가 대표하는 ‘지적권위’에 대한 도전의식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봅니다. 한국의 대학교육은 학생들에게 지적권위에 대한 좀더 강한 도전의식을 길러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케임브리지대에서는 한국처럼 주어진 교과서 한두권에 맞춰 진도를 나가는 게 아니라, 대립되는 내용을 가진 여러 글을 읽고 자기 견해를 개진하도록 교육시킵니다. 이런 교육방식은 교과서로 대표되는 ‘지적 권위’에 도전하는 의식을 길러주고, 어떤 이론이든지 한번 의문을 던져보는 습관을 갖게 해줄 겁니다.”

―한국 고유의 경제학 이론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나라마다 고유의 이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견해가 극단으로 가면 일반이론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니까요. 그러나 현재 객관적 일반이론처럼 통용되는 영미식의 사회과학 이론들도 결국 영미의 역사, 제도 및 가치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이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필요한 것은 나라마다 다른 역사, 제도, 가치 등의 요인들이 어떤 식으로 경제·사회 현상에 영향을 주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폭 넓은 이론틀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미흡하나마 제가 발전시키고 있는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적 접근방법은 이러한 이론틀을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실제 현실분석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제 연구는 대부분 두 가지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경제학적 방법론’인데, 이는 경제관계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정치적 관계를 분석하지 않고서는 경제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경제 분석을 한 후에 덤으로 정치 요소들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관계를 규정할 때부터 정치적 관계를 포함시키는 것이지요. 다른 한 가지는 제도주의적 접근인데, 이는 기업의 형태, 법률 구조, 정부개입의 방식, 사회적 관습 및 가치관 등 경제현상의 근저에 깔려 있는 각종 제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경제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경제현상 분석에 이러한 제도들의 영향을 도입하려는 방식입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 두 가지 방법론을 더 긴밀하게 통합하여 소위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 방법론을 개발하려 합니다.”

―한국인의 경제의식 중 취약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외국 문제에 어둡다는 것이지요. 선진국, 특히 미국이 하는 것은 무조건 좋다는 의식이 너무 뿌리 깊어 선진국의 경험에서 객관적인 교훈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조건으로 볼 때 한국은 유럽 선진국의 경험에서 더 배울 것이 많은데, 풍부한 자원, 넓은 국토, 무한정한 이민의 공급 등 우리와는 조건이 너무나도 다른 미국만 쳐다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죠.

“경제발전을 역사적 시각에서 조명해 보려 합니다. 내년 봄에 출간할 책 ‘사다리 차버리기(Kicking Away the Ladder)’에서는 선진국이 후진국에 경제발전의 비결로 추천 또는 강요하는 시장주도형 경제정책이나 제도가 사실은 그들조차 상당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후에 도입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입니다. 선진국도 발전 초기에는 보호무역이나 정부주도의 산업 정책 등을 썼고 특허 등 지적소유권도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등 ‘후진적인’ 방식으로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선진국이 자기들이 쓰지도 않은 정책과 제도를 후진국에 강요하는 것은 그들이 꼭대기에 올라간 후 타고 오른 사다리를 차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후진국 소장학자와 젊은 경제정책 입안자들에게 선진국 중심의 경제학이 아닌 후진국의 시각을 반영하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프로젝트도 추진중입니다.”

/정희정기자 nivose@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