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잠원동 둔치 입구 코너에 던킨도넛가게가 있는데 이곳에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무용하는 후배들과 가끔 만나 담소를 나눈다.

아침에 둔치에서 운동하고 난 후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무더운 여름밤에는 팥빙수를 즐기기도 하는 간이휴게소와 같은 곳이다. 얼마 전에 만나기로 한 후배가 조금 늦는 것 같아 그곳에 비치돼 있던 잡지 하나를 무심히 넘기고 있었는데 낯익은 이름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사진작가 G의 전시회 소식과 더불어 예술가로서의 생활에 관한 글이었다. 세련된 감각의 그의 스튜디오와 주거공간의 화보가 곁들여진 채 누구나 읽으면서 선망의 대상이 되게끔 잘 구성된 문장으로 그를 표현하고 있었다. 일상과 예술이 일치된 듯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세인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이유를 읽을 수 있었다.

사실 낯익은 이름이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세월을 보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여러가지 모습으로 만나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 둘중 어떤 이는 긴 인연이 있어 오래 관계가 지속되고 어떤 이는 그저 언제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라거나 혹은 거짓말처럼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학시절에 Y대 학생들과는 지리적인 친근감에서인지 자연스러운 만남들이 있었다. 그 사진작가가 바로 그 시절에 그룹으로 만나던 남학생 중 하나였다. 지금 기억으로 그는 키가 크고 항상 미소를 띠고 있는 매우 순한 인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늘 떠들어대는 혈기왕성한 20대초의 여느 남학생들과는 달리 말도 많이 안했던 것 같다.

그러한 그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끊임없이 그의 작품의 주제로 다루는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 나한테는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다. 내 자신이 이룩한 것은 아니지만 전혀 예상치 않던 평범했던 지인이 구축한 진지한 사고의 세계로부터 받는 자극이 또 다른 기쁨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자극 없이 아주 일상적이었던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됐고 뭔가 변화를 시도하자는 의욕을 느끼게 됐다. 그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할 때 늘 가슴에 두는 것이 있다. 지금 이 학생들이 언젠가 각자의 길을 가게 돼 서로의 만남이 없다 하더라도 자기를 완성시켜서 자기 이름에 책임져야 하는 어느 순간에 학창시절에 보여주지못했던 잠재력을 발휘,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기쁨과 자극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찌그러진 형태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너나없이 주장한다. 주위를 돌아봐도 바른 구석 하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뉴스가 바로 공포영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톨스토이가 그랬던가, 현실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일은 없다고. 엊그제 케이블 TV에서 어떤 여변호사가 충격적인 범죄사건의 소송을 맡을 경우를 생각해서 공포물 범죄영화를 보고 있다고 하자 동료 변호사가 “차라리 뉴스를 보는게 나을걸”하고 말하는 냉소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또한 문화적 환경의 부재 가운데 단발적이고 자극적인 현상들이 마치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인양 판치고 있고 긍정적인 방향제시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과연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선이 무엇인지를 언어로 말해줄 수는 있지만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딜레마에 빠진다.

다만 겉이 찌그러진 형태라도 그 안은 같이 찌그러져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사회가 일그러진 외형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안의 구성인자에 따라 언젠가는 그 안의 힘의 파장으로 바깥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이 전부인줄로 착각하여 자기 가치관을 세우기도 전에, 즉 자기가 나비가 될 수 있는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날기도 전에 도태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빛줄기에 의해 그 형체가 보이다가 가라앉아 버리는 먼지처럼 요동치지말고 하늘의 별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자기의 시간이 왔을 때 빛날 수 있는 그들이 됐으면 한다. 그리고 이 사회는 이러한 젊은 별들의 다양성을 키워줘야 하는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내면에서 어떤 불을 태울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초롱불이냐 촛불이냐 장작불이냐를 정해줄 것이 아니라 다만 불이 꺼지지 않도록 산소의 역할을 하고, 그래서 훗날 그들이 서로 가까이 있지 않아도 서로의 불빛을 보고 안 들리지만 가슴의 박동으로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의숙 성균관대교수 ·무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