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 일간지의 작은 기사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6년 황해도 백령도 등산진에서 체포될 당시의 보고서로 추정되는 문건에 관한 보도였다. 그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김 신부는 15세부터 23세까지 중국에서 서양학을 공부했으며 금 10냥, 은 30냥을 가지고 있었고 관헌에게 쫓겨다니면서 농아 행세를 하고 산 속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24세의 젊음이었다. 아무리 신부라고 하나 그도 사람이 아닌가. 오죽 고뇌에 찼으면 벙어리 행세까지 하면서 관헌의 눈을 피해 방황했겠는가. 김 신부는 결국 사제로서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1846년의 일이다. 이렇게 한국 밖 세상의 문물에 젖은 젊은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고 있을 그 무렵에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보다 10년 전인 1837년에 라부아지에의 화학이 소개되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45년전인 1801년 한국 최초의 천주교인이었던 이승훈은 45세라는 한창 나이에 역시 형장에서 그의 최후를 마쳤다. 1783년 말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갔다가 그 곳에서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천주교인이 된 사람이다. 그가 사형당한 다음 해인 1802년에 일본에서는 최초로 아이작 뉴턴의 역학을 소개하는 서적이 선을 보이고 있었다.

이조말인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양서 번역사업이 정부 방침으로 시작되고 동학의 교주 최재우가 사형당하기 한해 전인 1862년에 일본 정부는 당시의 선진국인 네덜란드에 유학생 15명을 파송하고 있었다. 이상의 모든 일들은 일본의 근대화에 획을 긋는 메이지(明治)유신이 있기 전인 도쿠가와(德川)막부 시대에 있었던 일이요, 우리나라는 이조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을 때의 사건들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1868년이었고 소위 한·일합방이 1910년이었던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보면, 당시는 세계적으로 식민지시대였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비춰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은 일본이 극악무도해서 일어난 결과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국이 못난 탓으로 일어난 결과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일본 속담에 도둑질하는 놈은 도둑놈이고 도둑 맞은 놈은 빌어먹을 놈이라는 말이 있다. 해방된 지 6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도 엄청난 대일 무역적자로 허덕이고 있는 이 나라를 일본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빌어먹을 놈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현재 전국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전임교수를 비롯해서 소위 보따리장수로 통하는 시간강사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외국의 박사 출신들 중에 이 나라의 국가기획에 따라 국비로 외국 유학을 갔다온 학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대학 한시간 강사료 2만원 미만의 소위 보따리장수들이 수만명을 헤아리고 있으며, 이 나라 대학강의 총 시간 수의 절반을 이들 보따리장수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오늘 이 나라 대학의 실정이다.

그런데 근자에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적인 학술지에 논문 1편도 내지 못하고 여전히 10년, 20년 전의 노트로 강의하고 있는 대학교수는 퇴출돼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했다는 보도에 접하고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대학교가 세계 73위밖에 안된다는 평가가 이 나라 최고통치자에게는 오직 못난 교수들의 탓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그 시각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때마침 서울대의 인문·사회·자연계의 교수 325명(총 436명)이 ‘기초학문 위기’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시장원리를 중시하는 대학운영 방침에 따라 대학의 이념과 본질이 크게 손상되어 보호 육성이 필요한 학문분야의 위기감이 증폭했다”고 오늘의 대학의 위상을 우려하고 있다.

인류의 전역사를 통하여 가장 변화가 많았던 15세기 이후 격동의 500년간을 한 왕조가 지배해온 은둔의 나라 한국에 가서 볼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일본까지 왔다가 한국 방문을 거부한 아놀드 토인비가 지금을 살고 있다면 대통령이 노벨평화상까지 탔으니 이제는 볼 것이 있다고 이 나라를 방문할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과거 200년에 걸쳐 추락된 이 나라의 지성을 이대로 방치하고 말 것인지 현 정권에 묻고 싶다.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