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형이 아버지의 시를 암송하자 지그시 이 눈을 감고 경청하던 동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6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센트럴시티 3차 이산가족 상봉장. 서정시인 정지용의 아들 구관(73·경기 의정부시 녹양동)씨는 전쟁 때 헤어진 북의 동생 구인(67)씨를 50년만에 만나 뜨겁게 끌어안고 흐느꼈다.

야속하게 흘러버린 세월을 원망하던 이들은 아버지 얘기를 꺼내며 무너지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구인씨가 “북한에서도 아버지는 김소월과 함께 최고의 애국시인으로 꼽히시는 분입니다”라고 소개하자 구관씨도 “내년 아버지 탄생 100주년에 맞춰 일본에서도 아버지의 시비를 세우려고 한다”며 구인씨에게 ‘정지용 전집’과 ‘향수’ 등의 시를 노래로 만든 테이프를 선물했다.

하지만 구인씨는 “아버지는 북한으로 오시던 중 남한의 소요산에서 미군의 폭격을 받고 사망하셨다”며 예전 북한 문학계의 주장을 되풀이해 정지용 시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북한 시인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진 채 남쪽에서 험한 삶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던 구관씨는 말없이 동생의 말을 듣고 있었다.

상봉장에 함께 나온 여동생 구원씨도 죽은 줄로만 알고 사망신고까지 했던 오빠의 얼굴을 말없이 어루만지며 세월의 무게를 실감했다. 어린 시절 “시는 배고픈 공부”라며 아버지가 말리던 사실을 회고한 이들은 함께 시를 암송하면서 덧없는 50년의 세월을 달랬다.

〈강연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