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 옛터에서 본 대제국의 잔영

숙소로 정한 집안빈관 을 빠져나와 집안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조선족 택시기사가 재빨리 따라붙는다. 택시라고 해야 세발 오토바이를 개조하여 네 명이 앉을 만한 의자를 얹은 것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단체로 관광을 왔다, 1시간 가량 휴식 중에 가볼만한 곳이 없겠냐고 물으니 북한 만포시와 이어진 압록강 철교 쪽으로 가보자고 한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잘 사귀어두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싶어 차에 오른다.

문화일보사가 주최하고 CNC여행사가 주관하는 고구려·발해·백두산 문화탐방에 참가하면서 개인적인 관심사는 고구려 유적지의 심층취재였다. 일박하는 곳이 통화에서 환인으로 바뀌자 내심 기대에 부풀어 있기도 했다. 환인에는 고구려 최초의 성인 오녀산성(졸본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가보기로 하고 조선족 가이드에게 오녀산성을 안내해줄 사람을 구해달라는 부탁도 해두었다. 그러나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할 때도 많고 거친 도로를 강행군하다 보면 버스가 고장이 날 수도 있다는 건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환인에 도착했을 때는 일정상 새벽에 일찍 집안시로 출발해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이 되레 고마울 정도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탐방단 일행은 8월 11일 저녁 단동페리를 타고 인천항을 출항, 이튿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중국 동황항에 입항한다. 여기서 50분 가량 버스로 이동하여 단동시에 들려 압록강 단교 를 관광한다. 일제가 폭파하여 끊어진 상태 그대로 둔 압록강 단교 옆에는 새 철교가 신의주로 이어져 있었다. 몸은 비록 압록강 단교 끝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지만 마음만은 새 철교처럼 강을 가로질러 달려간다. 경의선이 복원된다고 하니 남쪽에서 기차를 달려 신의주를 거쳐 단동으로 건너오는 것도 시간문제이겠건만 북한 풍경은 여전히 카메라를 고정시켜 촬영한 영화장면 처럼 멀고 답답한 채로 남아있다.

다음 코스는 수풍댐. 단동에서 100km를 달려 관전까지 가서 남쪽으로 장전을 거쳐 56km를 가야 한다. 수풍댐하면 일제가 군수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지은 한국 최대의 수력발전소라는 사실만 강조되었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착취를 통해 그것이 가능했고 수많은 수몰민을 낳았던 사실은 흔히 간과되곤 한다. 다시 관전으로 나와 환인까지 160km를 달렸고, 13일 아침 환인을 출발, 오전 내내 버스를 타고 400여년 고구려 도읍지인 집안으로 달려왔건만 조선족 기사는 압록강 철교를 보러 가자고 하니 쓴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그러나 정작 철교를 건너가 보지는 못한다. 철교를 지키는 경비병이 중국돈으로 50원(우리돈 6000원가량)을 요구하니 오히려 조선족 기사가 소매를 끌며 먼 발치에서 사진이나 찍고 가자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는 집안역 앞 주택가에 있는 고구려 돌기둥으로 안내한다. 집안시에 와서 처음 보는 고구려 유적이다. 키가 2.2m나 되고 위로 갈수록 좁게 다듬어진 4각 기둥은 채마밭 가에 외롭게 서 있다. 그 때는 경황이 없어 가보지 못했지만 거기서 40m 떨어진 곳에 키가 3.6m되는 돌기둥이 또 하나 있다. 이 두 기둥의 정체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부근에서 유적이 발굴된 건축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석궐(중국의 장식 문)이거나 제사를 지내던 장소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보면 고구려 유적 가운데 그나마 낯익은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돌기둥 뿐이다. 키가 큰 돌기둥은 머리 끝이 뾰족하고 작은 돌기둥은 둥그렇게 다듬어져 있어 우리의 마을 입구에 세워진 암수의 선돌과 빼닮은 점이 흥미롭다.

탐방단 일행은 오후에 휴식을 마치고 집안박물관을 찾는다. 박물관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게 좋다. 고구려가 망한 뒤 철저히 도굴을 당하여 유물이 적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중국 변방의 고구려족 운운하는 안내문은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하지만 광개토태왕비의 탁본(진본은 아닌 것 같다)이나 고분벽화 모사화는 잘 정리되어 있다. 고구려 문화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서는 고분벽화를 봐야 하는데 한 곳을 빼고는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들려 아쉬움을 달래야 한다. 특히 판매하는 벽화그림은 모사나 인쇄가 뛰어나 중국돈 600원으로 싼 편은 아니지만 권할만 하다.

그렇다면 5세기 무렵 세계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군림하던 고구려를 어디로가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조급해하지는 말자. 지금부터 찾아가는 성곽과 무덤들을 보게 되면 고구려를 말할 때 왜 감탄사를 붙여 아! 고구려 라고 하게 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박물관을 나와 집안시의 서쪽을 흐르는 통구강을 끼고 북쪽으로 2.5km쯤 가면 산성자교라는 다리가 나오고 그 다리 위에서 보면 팔을 벌리고 있는 듯한 환도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환도산성은 676m 산 정상을 에워싸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산 꼭대기에 무거운 돌을 옮겨 튼튼한 성곽을 쌓은 것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 기록에도 중국인들은 늘 고구려의 성 축조술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198년에 지은 환도산성은 아직도 멀쩡한데 만리장성은 대개 명나라 이후에 쌓은 것만 남아 있어 고구려 성의 우수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환도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비운의 왕성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역사상 두 번 왕성을 잠시 함락당한 적이 있는데 모두 환도산성에서 일어났다. 방심하다가 허를 찔린 것이다.

환도산성이 가장 높게 남아 있는 북벽을 보고 내려오려면 한나절은 걸린다. 탐방단 일행은 남문쪽 성벽을 지나 약 11m 높이의 장대(전망대)까지만 올라갔다. 옛날에 장수들이 전투를 지휘하던 곳으로 산성자교와 집안시내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뒤를 돌아보니 병영터였다고 하는 솔숲과 환도산 기슭의 왕궁터가 보인다. 장대에서 내려오다보면 병사들이 말에 물을 먹였던 못인 음마지가 마르지 않은채 하늘을 비추고 있다. 우리는 음마지 주위를 서성이며 1천800여년이란 세월을 잠시 잊는다. 장대와 못은 고구려 성의 특징이다. 못의 수량에 따라 주둔군의 규모를 결정했다고 한다. 오녀산성에도 800m 고지에 못이 있다. 못 이름은 천지다.
버스가 서 있는 산성자교로 내려오니 일행들은 이미 산성하무덤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집안시 일대에는 고구려 무덤이 1만기가 흩어져 있다. 공동묘지를 상상하면 안 된다. 언덕만한 것에서부터 초가 삼간만한 것까지 당당한 돌 건축물로서 도시를 장식하고 있다. 무덤이 1천기가 흩어져 있는 산성하무덤떼에는 다음날 점심시간에 무엇에 홀린듯 혼자 달려오게 되므로 그때 다시 얘기하기 하자. 환도산성을 떠나 집안시 중심가로 들어오면 바로 국내성 북문 자리가 된다. 국내성은 정방형으로 둘레가 2.6km다. 유리왕 22년, 서기 3년에 원래부터 있던 토성을 가운데 두고 돌을 쌓아 축조했다. 토성은 고조선 때부터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국내성은 우리 고대사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도시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해서 퍼져나갔다. 시정부나 큰 호텔이 국내성 안에 있는데 웬만한 주요 건물들은 모두 예전에 궁궐이 있던 자리다. 그 건물들은 기와조각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 시대에 얼마나 큰 궁궐이 있었는지는 박물관 뜨락에 모아놓은 몇개의 주춧돌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궁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옛 영화를 간직한 국내성도 점점 그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1930년대의 사진을 보면 9m 높이의 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90년대초까지만 해도 시내 중심가에 있는 북벽의 경우 두 길 정도는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빠르게 훼손되기 시작, 좌판이 늘어서 있는 큰 길가에만 사람 키 정도만 남아있는 정도다. 학자들은 국내성이 한국에 있었다면 국보 1호감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국보 1호감인 성벽이 아파트 화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남아 있는 성 조차도 개보수를 했는지 고구려 성의 특징인 들여쌓기 흔적을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고구려 성이 튼튼했던 것은 일정한 높이까지는 계단식으로 들여쌓기를 했기 때문이다. 장수왕릉과 같은 큰 돌무덤을 보면 모두 들여쌓기를 했다. 8월 14일 새벽 6시 조선족 기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내성이 조금 높게 남아있는 서벽 쪽을 안내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최동해라는 것도 알았고 호출번호도 적어놓았다. 국내성 서벽은 통구강을 바라보고 들어선 주택들의 뒷담이 되어 가까스로 남아 있었다. 눈 대중으로 높이는 3m쯤 되었고, 다시 쌓은 흔적이 역력했으며 아래는 흙 속에 묻혔는지 들여쌓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기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발해의 땅이 되었다가 10세기 이후에는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한족이 번갈아가며 차지 했으니 성의 윗부분은 무너져 다시 쌓기도 했을 것이다. 청나라 때는 신성한 땅이라고 하여 200여년간 한족의 이주를 금지시켜 황무지가 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인구 21만의 도시가 되었고 도로에는 세발 오토바이가 질주하고 있다. 조선족이 모는 세발 오토바이를 타면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것 같다. 그것은 남한보다 낙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레를 교통수단으로 삼아 부를 축적하고 대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 시대에 비하면 훨씬 초라한 모습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배낭에 넣고 갔던 역사책의 제목이다.

<글·사진/오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