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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 화가

지금 내가 가진 마스크는 다섯 장이다. 그것도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던 어느 해 겨울, 사 두고는 쓰지 않은 검은색 황사 마스크다. 게을러서 약국에서는 아직 한 장도 못 샀다.

그 가운데 검은색 KF94 황사 마스크가 얼마나 멋진지, 그 기능이 얼마나 훌륭한지 나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말 몰랐다. 이제 보니 그 검은색 황사 마스크는 아랍 여인들이 눈만 내놓고 둘러쓰는 차도르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란에서는 왜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 걸까? 이 심각한 상황에 그렇게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마스크가 다섯 장밖에 없다는 불안감보다는 다섯 장이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쪽으로 줄 서고 싶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주말·휴일에 새벽같이 줄 서서 번호표를 받아야 겨우 마스크 두 장을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한 달 전만 해도 마스크를 쓴 사람들 사이로 맨 얼굴로 다니는 스릴을 느끼는 참 철없는 화가였다.

더 큰 문제는, 생각지 않은 데에 있었다. 노모와 나의 살림을 도와주는 도우미 분의 마스크가 늘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몰고 오는 세상의 바람은 노모를 지켜야 하는 내게는 늘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내게 마스크의 기억은 유난히 감기에 잘 걸리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다. 감기에 걸릴 때마다 편도선이 부어오르던 내게 어머니가 씌워준 하얀 마스크는 어린 딸의 섬약한 호흡기를 보호하려는 소극적인 안전망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마스크의 형태와 기능이 그리 달라지지 않는 게 늘 신기했다. 그리고 언젠가 백화점에서 몬드리안의 추상적 그림이 그려진 마스크를 발견했다. 그 순간 언젠가 마스크에도 다양한 패션이 도입돼, 갖가지 그림이 그려진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미세먼지 가득한 거리를 활보하는 풍경을 그려보기도 했다. 어쨌든 그때 그 몬드리안 마스크는 너무 비싸서 사지 못했다.

어느 날 상상도 할 수 없는 코로나19라는 이름의 바이러스가 이 땅에 쳐들어 왔고, 덕분에 2월의 인도 여행을 취소했다. 그 뒤 인도는 카레를 만드는 강황 덕분에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소식들이 들려왔고, 한 달 사이에 내가 갈 수 있는데 안 간 게 아니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금지된 국경들이 늘어났다. 인공지능(AI)의 탄생을 축하함과 동시에 두려워하는 이 초디지털 시대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다는 아이러니가 정말 꿈만 같다.

요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림 전람회를 열고 있는 화가들을 생각한다. 어디 그림뿐이랴.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손님 하나 없는 백화점에서 마스크를 쓰고 거닐었다. 사람 발길 없는 식당가에서 호젓이 밥을 먹고, 밤이 돼 동대문 의류 시장에 들렀다. 그동안 화재 때문에 고생한 상인들이 이번에는 코로나19라는 재앙을 만난 셈이다. 손님이 너무 없어도 6개 층에 걸쳐 빼곡히 늘어선 의류 가게에 나와 앉은 상인들은 다들 누가 뭐라든 자기 길을 가는 의연한 예술가들 같다.

서울시가 지하철에 써 붙인 ‘잠시 멈춤’ 캠페인을 읽었다. ‘지인들과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 순간, 언젠가 본 공상과학 영화의 기억을 되살리듯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정말 그동안 우리 삶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잠시 멈추고 호흡을 고르라는 신의 계시인 건 아닐까? 마스크가 신이 된 이 세상에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오래된 정의에 동감한다. 낯선 질병과 천재지변 한 방에 꼼짝 못 하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호모사피엔스, 그 이름 인간이여. 이 첨단 디지털 세상에서 아직도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도구는 여전히 아날로그다. 너도나도 잘난 척할 게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