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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소설가, 서강대 명예교수

자신과 관계가 평화롭지 못할 때
외적인 조건이나 주변 사람 탓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자신과 솔직하고 깊은 대화 나눠

웰빙 못지않게 웰다잉 중요성 커
육체적 질병도 평화롭게 마주하자

평화란 단어만큼 그 뜻이 깊고 아름다운 단어도 없다. 좋아하는 단어들은 관습적으로 여러 나라의 언어로 찾아서 익히고 있다. 아마도 평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의 서열 3위쯤 되지 않을까 한다. 평화를 나타내는 무수한 나라의 언어 중에서도 그리스어로 평화를 뜻하는 단어 ‘에이레네’가 가장 마음에 든다.

언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 관계가 있다면 아마도 에이레네가 평화의 의미를 음성학적으로 제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프리든, 파즈, 흐핑, 샬롬, 미르…. 여러 나라의 평화를 뜻하는 단어 중 에이레네는 모음으로 시작되는 드문 단어이기에 음악적이기도 하다.

모든 추상적인 단어가 그렇기는 하지만, 평화만큼 사용되는 범주에 따라 그 의미의 폭이 변화무쌍한 단어도 없는 듯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평화의 반대되는 단어로 전쟁을 연상하기 일쑤다. 오랫동안 고대 세계에서 평화는 전쟁이 없는 때를 가리켜왔던 만큼 틀린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가 독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비록 그 방대한 소설을 읽은 독자는 적을지라도, 톨스토이라는 이름마저 현대의 독자들에게 잊혔을지라도, 책의 제목은 상식 문답이나 퀴즈, 또는 여주인공 나타샤로 분한 오드리 헵번의 열연으로 기억되는 영화 ‘전쟁과 평화’를 통해 꾸준히 현대의 독자들을 찾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2001년부터 시작된 세계 평화지수(GPI)도 어찌 보면 평화의 측정 기준에 전쟁, 범죄, 무기 수출, 테러, 폭력 등 한 국가의 정치·사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현대 사회가 고대 사회보다 평화의 관점에서 더 발전했거나 진화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전쟁이나 범죄, 테러의 양상이 기술적으로 최첨단화했으니 이 면만을 보면 현대의 평화지수는 고대 사회보다 더 후퇴했다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평화에는 외적인 평화가 있고, 내적인 평화가 있다. 특히, 내적인 평화는 외적인 평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외적인 평화의 지표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국가의 차원에 앞서 개인들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내적인 평화를 잃은 개인이 한 대륙, 한 국가, 한 공동체, 한 가정, 한 타자의 삶을 위기로 내모는 사건을 거의 매일같이 만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언어는 기본적으로 소통을 위한 것이니만큼, 그렇지 않은 단어가 없겠지만, 평화만큼 관계적인 단어도 드물다. 한 개인은 절대자와의 관계, 사회적 관계, 개인적 관계 등 무수한 범주의 관계가 교차하는 집합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관계에 앞서 한 개인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관계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자서전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내면의 깊은 골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자서전은 자주 외적으로는 성공담의 양상을 취하지만 결국은 한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얻는 서사로 귀결된다.

하다못해 희대의 범죄자의 자서전도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후회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 틀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많은 소설은 상상력을 동원해 한 개인이 처한 삶의 다양한 불화·불균형·불행이 어떤 경로를 통해 마침내 외적·내적 평화에 다다르는지 드라마틱한 과정을 그려낸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평화롭지 못할 때 우리는 자주 외적인 조건들이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원인을 돌릴 때가 많다. 우리의 매일의 삶은 사실 평화보다는 전쟁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기에 어느 정도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유의해서 관찰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과 솔직하고 깊은 대화를 하는 것을 익힌 사람들이다. 때로는 어려움 앞에서 투지로, 때로는 겸손으로, 때로는 절제로 자신과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어 덕분에 주변 사람에게도 평화를 선사한다. 사회적인 관계에서 외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과의 대화자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모든 면에서 건강하다. 그리고 육체적 병을 얻더라도 그것을 평화롭게 마주해 주변을 놀라게 한다. 평화는 웰빙 못지않게 중요하게 부상하는 웰다잉의 핵심적인 표지가 됐다.

평화에 관한 주제로 몇 편의 작품을 쓰던 중 이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접하게 됐다. 그러던 중 읽게 된 한 인터뷰 기사가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몇 년 전 103세로 소천한 방지일 목사의 생전 인터뷰였는데, 기자가 장수 비결을 묻자 일반적인 기대를 벗어난 그의 대답이 놀라웠다. “매일 아침 눈물로 회개하는 것이 나의 건강 비결”이라고 답한 것이다. 이렇게 내면 깊은 곳을 매일 눈물로 씻어내는 것이 그분의 장수 비결이자 평화 비결이었던 것이다.

평화에 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다. 전쟁과 불화가 두려워 평화를 외친 나치주의자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평화라는 단어는 또한 억울하게 이용당해 왔다.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 자를 평화의 사도로 내세워 평화가 말만의 구호로 쓰이기도 했다. 또한, 무수한 전쟁이 평화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인류의 어두운 역사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하다.

우리는 모두 자신과의 솔직한 내면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평화는 거기서 시작되는 것 같다. 자신의 모습을 잘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에이레네를 배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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