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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정민(사진 왼쪽) 교수는 전남 강진 백운동을 찾아 이시헌의 5대 손인 이효천(오른쪽) 선생을 통해 조선 차 문화를 정리한 ‘동다기’의 원본인 이덕리의 ‘다기’ 등이 실려있는 ‘강심’을 발굴했다. 글항아리 제공

이미지 크게보기 ‘강심’의 나중에 발견된 다른 사본인 ‘강심만록(江心漫錄)’의 표지(맨 위 사진)와 첫 페이지.

-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 정민 지음 / 글항아리

2006년 백운동 답사한 저자
‘강심’이란 책을 우연히 접해
‘동다기’ ‘상두지’ 실체 드러나
정약용 저서가 아님을 밝히고
이덕리가 세상과 만나던 순간

주인공을 동명이인 잘못 발표
학자로서 죄책감 느낀 저자가
이덕리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치열한 실학정신 복원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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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이덕리(李德履·1725∼1797)라고 하면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다. ‘연암’과 ‘다산’ 등 한국 한문학을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만든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 저자인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2006년 11월 ‘이덕리’란 인물을 220년 만에 처음 햇빛 속으로 끌어냈다. 조선 후기 실학의 한 귀퉁이를 복원했던 연구로, 무엇보다 조선 차(茶) 문화를 처음 전문적으로 다뤘던 ‘동다기(東茶記)’가 그동안 다산 정약용의 저서로 통했는데, 이덕리가 쓴 ‘기다(記茶)’가 그 원전임을 밝혀내고 필사본을 발굴해 신문 지상을 장식했다. 한국 차 문화계도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당시 정 교수가 발굴해 언론에 보도된 ‘이덕리’는 1728년생의 동명이인이었다. 이름을 숨기고 저작을 내야 했던, 실재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서 슬펐고 죽어서도 불운했던”, 그래서 직계 후손들조차 그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실학자 이덕리. 이 책은 정 교수가 묻힌 이덕리의 혼이 이끌기라도 한 것처럼, 10여 년간 우연과 운명이 교차하는 가운데 학자적 열정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는 과정과 파란만장한 이덕리의 삶과 실학 정신을 복원한 기록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거쳤던 학자로서 좌절과 흥분, 의무감과 죄책감, 고마움 등이 얽혀져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을 보는 듯도 하다. 고문서를 공유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학자나 후손, 그렇게 된 그동안의 학계 분위기 등도 덤으로 들여다볼 수 있어 흥미롭다.

처음에는 ‘우연’이 관여했다. 정 교수는 2006년 9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의 출간을 준비하며 그 마무리를 할 겸 전남 강진을 답사했다. 그 전해에 강진에서 열린 ‘다산친필유물전’의 도록에 다산이 강진 백운동(白雲洞)에 살던 막내 제자 이시헌(1803∼1860)에게 보낸 편지가 몇 통 들어있었는데, 그 실물을 보려는 목적이었다.

강진 다산연구원에선 소장자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연락처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역시 우연히 지인의 도움으로 그 친필이 있는 백운동 골짜기를 찾게 된다. 이시헌의 5대 후손인 이효천 노인이 백운동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도 처음에는 정 교수의 방문에 탐탁지 않은 눈치를 준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노인은 이 전에 찾은 연구자들이 자료만 가져가고 연락이 없다든지, 자료를 돌려달라고 하면 못 찾겠다면서 돌려준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등 좋지 않은 경험 탓에 경계했던 것이다. 다행히 정 교수가 당시 나온 책 ‘죽비소리’를 전해주자, 노인은 “서울에서 주문해 읽고 읽던 책”이라며 반겼고, 둘 사이의 경계는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자료를 다 보고 일어서려 할 때 노인은 무심하게 이시헌이 필사한 ‘강심(江心)’이라고 표제가 적힌 책 한 권을 꺼냈고, 그 안에 ‘記茶’와 ‘기연다(記煙茶)’라고 쓴 제목의 글이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찰나의 우연은 두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숨겨진 실학자와 저술, 바로 ‘동다기’와 ‘상두지(桑土志)’의 온전한 실체를 밝히는 것으로 이어졌다.

정 교수는 ‘강심’에 들어 있는 ‘기다’에서 막히자 다도를 정립한 초의(草衣) 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을 펼쳤고, 그중에 등장하는 ‘동다기’에 관한 언급에 눈길이 꽂혔다. 그에 대한 정보가 없는 가운데, 25년 전 ‘다담’이란 월간지에 용운 스님이 ‘동다기’를 발굴해 8회에 걸쳐 연재한 것을 알게 됐다. 1891년 대흥사 승려 법진(法眞)이 필사한 것으로, 그 내용은 바로 ‘기다’와 일치했으며, 여러 오자와 상당량이 빠진 불완전한 사본이었다. 정 교수는 백운동본을 통해 ‘전의리(全義李)’라고 알려진 집필자가 ‘전의 이씨’ 이덕리라는 것까지는 밝혀냈지만, 실제 이덕리보다 세 살 연하인 1728년생의 동명이인 이덕리가 저술의 주인공이라며 논문으로 발표했던 것.

왜 실제 이덕리는 ‘전의 이씨’라고만 했을 뿐 족보에까지도 숨겨 어둠 속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이덕리의 형 이덕사(李德師·1721∼1776)는 정조 즉위 시에 사도세자 추숭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노론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정조에 의해 능지처참 됐다.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입어 당시 52세였던 동생 이덕리 역시 진도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덕리는 71세까지 유배지에 틀어박혀 이름을 숨긴 채 ‘강심’과 ‘상두지’를 집필했고, 이후 영암으로 옮겨졌다가 73세에 자취도 없이 세상을 떴던 인물이다. 후손들조차 족보와 묘소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후손들은 정 교수의 연구로 족보도 바로잡고 묘소도 찾았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차 문화가 없는 조선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조선의 차에 관한 저술도 그저 중국 것을 정리한 정도였다. 이덕리의 ‘기다’는 조선의 차 문화를 처음 정리했을 뿐 아니라 농한기 유휴 인력을 활용한 차 생산과 국가 전매를 통해 국부를 창출할 것을 제안한 실학적 저서다.

‘기연다’에서는 담배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하고, 담배로 인한 실생활의 폐해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금연령 시행을 제시하면서도 이를 통해 창출되는 경제 효과만으로도 1년에 1260만 냥을 절약할 수 있다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역시 다산의 저술로 잘못 알려졌던 ‘상두지’는 변방의 둔전 경영과 축성 및 도로와 수로 운영, 각종 화포와 수레 제도의 적용을 꼼꼼히 정리한 책이다. 당대 이덕리는 실학을 통해 조선 사회의 변화를 꿈꿨던 것이다.

책 말미에는 나중에 더 완성된 본으로 발굴한 ‘의암본 강심만록’과 백운동본 ‘강심’의 ‘기다’ 부분을 원전 도판으로 실어놓았다. 433쪽, 2만2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