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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나남출판·나남수목원 회장

고려 세운 궁예 905년 철원 천도
편히 사는 세상 ‘泰封國’ 첫발

20년 총애하던 부하 왕건 쿠데타
미륵불 이상향 未完의 혁명으로

역사적 전기 맞은 남북의 교류
첫 성과는 궁예성터 복원이길

수목원 가는 길에서 1100여 년 전의 궁예(弓裔)가 걷던 많은 흔적과 만난다. 새 시대를 꿈꾸며 변혁의 의지를 불태운 풍운아의 자취여서인지 전설이 돼 바람결에 실려 온다. 10년 전 경기 포천군 신북에 20만 평의 수목원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파주의 출판사에서 임진강을 끼고 잘 뚫린 길을 따라간다. 교통량이 적은 상쾌한 길이다. 나무처럼 살기 위해 꿈꾸고 때로는 고통의 축제 속에 모양을 갖추어가는 수목원 디자인 설계의 8할은 수백 번 오고 간 이 길 위에서 숙성됐을 것이다.

국토 분단 70년은 대륙을 말 달리던 우리를 섬나라에 갇혀 살게 했다. 한강이 넓은 바다로 나가는 반도의 중심이 접적(接敵) 지역인 블랙홀로 변했다.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로 더 남쪽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며 공동체보다 자기의 생명과 재산만을 생각한다. 입으로는 통일을 노래하지만, 머릿속에는 100만 교포가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보다 더 먼 곳으로 각인돼 있는지 모른다. 분단의 광기(狂氣)가 걷히고 새 역사가 시작되는 찬란한 빛인 남북 판문점 정상회담이 열린 지 석 달이다.

교하에서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에 이르는 바다 같은 강의 모습에 가슴이 트인다. 문산을 지나면 임진왜란 때 임진강을 건너 피란 가던 못난 선조가 한밤중에 불을 밝히려 정자를 뜯어냈다는 이율곡의 화석정을 지난다. 연천 고량포 주변에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무덤 표지판도 스친다. 후백제 견훤의 지배를 벗어나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친 그는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임진강 북쪽에 묻혔다.

파주 적성의 임진강변 어유지(魚游池)리에는 수도 철원에서 개성으로 가던 궁예가 마차에서 내려 배로 갈아탔던 곳이라는 설화도 있다. 주상절리(柱狀節理)의 한탄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곳이다. 교하를 거쳐 서해로 나가 개성으로 입성하는 궁예왕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한다. 수목원 가는 길은 궁예가 걷던 길의 어느 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에 자주 빠져들면서 몇 번 그를 스친 것 같은 기시감도 들기 시작했다. 궁예의 그림자 한 자락이라도 밟아 보려는 1000년의 시간여행은 철원 현장을 찾아 발품을 파는 일이 먼저였다.

5년 전, 한탄강을 따라 오르며 처음 철원을 찾기 시작했다. 미군 정보부대가 철수하고 일반에게 개방된 소이산에서 바라본 일망무제의 철원평야는 장관이었다. 인간이 만든 방책선이나 철조망은 짐짓 모른 체하고 건너뛰기로 했다. 북한의 평강고원으로 짐작되는 곳까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푸른 지평선을 본 것은 황홀한 첫 경험이었다. 27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용암이 만든 드넓은 평야는 대제국이 웅자를 틀 만한 도읍지로 크게 다가왔다. 왕국 건설의 물적 토대는 드넓은 곡창지대의 생산력이기 때문이다. 새 도로명 사업으로 철원의 큰길 이름을 ‘태봉로’로 정한 후손들의 가슴 깊은 곳에 서린 궁예를 기리는 뜻으로도 1000년의 신비를 다 알아챌 수는 없다.

옛 모습의 월정역을 둘러보고 작은 모노레일로 철원평화전망대에 오르면 바로 발아래 태봉국 도성지인 궁예성터가 1000년의 고독으로 반긴다. DMZ를 중심으로 들어앉은 성터의 위치를 커다란 지도 위에 선명하게 안내한다. 토석 혼축 방식의 외성이 12.5㎞이다. 내성 7.7㎞, 궁성 1.5㎞이다. 450년 후 정도전이 우람하게 돌로 설계한 조선의 한양도성이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5km가 되지 않으며 전체가 17km인 점을 비교하면 당시 궁예의 위세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901년 평양에서 충주 이남까지 한반도의 중앙을 장악한 궁예는 개성에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고려를 건국한다. 청주에서 1000호 7000명을 이주시키는 등 준비를 마치고 905년 철원으로 천도한다. 해양상인인 개성 호족들과 결별하고 서로 뜻을 함께하여 편히 사는 세상을 꿈꾸는 태봉국(泰封國)의 우렁찬 첫걸음이었다. 내쳐진 신라 왕자의 혹독한 성장 과정도 늠름하게 이겨낸 궁예도 호족 연합 세력의 덫에 걸려 20년이 되지 않는 새 나라의 꿈을 접어야 했다. 918년 20년간 총애하던 부하 장수 왕건의 신군부 쿠데타로 궁예의 미륵불 이상향은 미완(未完)의 혁명(革命)으로 깊은 잠에 빠진다.

모든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궁예의 역사는 왕건의 고려에 의해 철저히 묻힌다. 또 500년이 지나고 일제강점기가 되자, 거대한 철원평야의 쌀에 눈독을 들인 일제는 1914년 원산항까지 철도를 부설하고 전국에서 1500호 1만 명 넘게 강제 이주시키는 등 철원을 당시 서울 인구의 3분의 1인 8만 명의 대규모 식량 생산기지로 만든다. 궁예의 비원(悲願)은 그때에도 살아 번득였는지 일제는 대평원의 경원선 철로로 궁예성터를 가로지르는 만행을 자행한다.

원재길 소설가의 신간 장편소설 ‘궁예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를 수목원에 초대해 하룻밤을 같이했다. 미친 세월에 거대한 해일을 일으켜 세상을 세상답게 만들려 온몸을 바치고도 어둠의 동굴에 갇힌 궁예를 주술로 풀어내 같이 춤추는 듯했다. 혁명의 성채였을 화개산 도피안사의 도선국사도 흥겨워하고, 갸름한 얼굴에 지권인(智拳印)을 한 철조비로자나불상이 염화시중의 미소를 보낸다.

역사적 전기를 맞은 남북 교류의 첫 성과는 철원 궁예성터 복원이었으면 싶다. 분단이 길다 보니 상징이 될 만한 남북의 정신적 공통분모가 많지 않은 아쉬움 때문이다. 성지 복원으로 1000년 넘게 갇힌 궁예의 웅혼한 혼을 불러내는 초혼제가 남북 번영과 평화의 역사적 장정을 축복할 것 같은 통쾌한 예감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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