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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첫 개최 한·중·일 서예전…‘동아시아 필묵의 힘’展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 기원
韓·中·日 작가 75명 작품 엄선
필묵공동체의 예술 DNA 확인
日 ‘칼날’·中 ‘곡선’ 미묘한 차이
韓작품엔 곡선·직선 조화 ‘눈길’

백자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고 애지중지했던 이가 바로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수화 김환기였다. 달항아리 그림으로 시작된 그의 구상화는 뉴욕으로 옮겨가 ‘전면점화’라는 추상으로 발전한다. 우리의 전통공예품인 달항아리야말로 김환기로 하여금 한국미술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근대 미술에서 현대 미술로 옮겨가는 가교 역할을 하도록 한 원동력인지 모른다.

굳이 김환기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현대 한국미술의 뿌리가 전통 ‘서화’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서예가 우리 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땅에 떨어져 있다. ‘서화골동(書畵骨董)’에서 알 수 있듯 조선시대에는 글씨인 ‘서’가 그림인 ‘화’의 앞에 있었다. 그런데 근현대로 접어들어 서구미술이 밀려들며 ‘서’와 ‘화’가 분리돼 ‘화’만 예술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박원규 작가의 ‘平昌’(평창, 480 X 280cm, 왼쪽 큰 작품)으로 평창의 눈(雪)으로 먹을 갈아 평창 현지에서 작업했다. 위의 작품은 일본 작가 가네코 다이조의 ‘堂然事’(당연사, 왼쪽)와 중국 작가 왕둥링의 ‘亂書’(난서). 서울예술의전당 제공

현재 서예는 일부 호사가의 취미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이따금 열리는 서예전도 ‘그들만의 리그’인 ‘공모전’ 일색이다. 미술 시장도 마찬가지다. 경매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같은 고미술품 외에 국내 현존 작가들의 서예작품은 출품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 컴퓨터 시대를 맞아 오히려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특별한 예술로 서예가 인정받는, 중국의 현대 서예 작가 작품은 ‘1급 작가’의 경우 전지 사이즈(70×140㎝) 크기만 돼도 4000만~5000만 원 이상 호가한다. 그런 점에서 서울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 서예박물관에서 4월 1일까지 열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기념 한·중·일 서예전 ‘동아시아 필묵의 힘(East Asia Stroke)’ 전은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전시에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공통 언어인 서(書)를 키워드로 한 한·중·일 작가 75명의 엄선된 작품이 선보인다. 서예인들은 이번 전시가 21세기 동아시아 글씨의 횡단면을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한·중·일 최고 수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전시가 지니는 의미는 그 이상이다. 동아시아에서 이런 전시가 열린 것은 이번이 사상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친목 도모 차원에서 몇 차례 열렸으나 그나마도 소규모이며 ‘한·중’이나 ‘한·일’ 서예전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달라도 필묵을 놓고 보면 3국은 공동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서’라는 것은 동아시아 문화 예술의 DNA 유전인자다. 그럼에도 서구미술이 동아시아를 점령하며 서에 대한 관심은 점점 우리 곁을 멀어져 갔다. 그리고 고답적 장르로 추락했다.

하지만 서예박물관에서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서에 대한 일반인들의 그 같은 상식을 깨트린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우는 큰 사이즈의 작품들은 ‘서예’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지루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시각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본의 서에서는 날카로운 칼날이 느껴지고, 중국의 서에서는 완만한 곡선이 감지되며, 한국의 서에서는 곡선과 직선이 섞인 조화로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서예박물관의 이동국 전문위원은 “전통을 지켜내면서도 전통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미감을 담아내는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전시된다”며 “동아시아 미술이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갈 것인지 그 정체성 문제를 최초로 제기하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이번 전시를 평가했다.

한편 23일에는 ‘21세기 서(書)와 동아시아 평화(平和)’를 주제로 국제학술포럼이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개최된다. 한·중·일 3국의 서예가, 예술평론가, 학자 등이 발표자로 나서 한·중·일이 공유하고 있는 서예 문화가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 토론하며 한·중·일 서예 양상에 대해서도 다양한 시각에서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