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관광객들이 지난 22일 서울 북촌 일대 한옥거리를 둘러보고 있다. 이광수 소설 ‘무정’의 공간적 배경인 북촌은 20세기 초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가장 고색창연한 거리로 남아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41 이광수 소설 ‘무정’의 배경 ‘북촌’일대

이광수의 소설 ‘무정’(매일신보 1917년 1월 1일∼6월 14일 연재)만큼 한국인이 많이 읽고 연구한 소설은 드물다. 이것은 무정이 최초의 한국 근대 장편소설이라는 영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남다른 깊이와 넓이를 확보했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인물 심리 묘사의 깊이, 근대적 연애관의 소개, 언문일치체로의 진전, 문명개화에의 지향 등 무정이 성취한 문학적 업적은 너무나도 지대한 것이지만, 그러한 성취의 목록 한편에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근대적으로 분절 구획된 구체적인 삶의 공간을 형상화한 최초의 소설이라는 측면도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 무정은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풍성하고도 정밀한 당대 여러 공간들(서울, 평양, 삼랑진 등)의 로컬리티(locality)를 주밀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공간에는 고유한 의미와 사상, 이념 등이 새겨져 있으며, 그것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무정의 전반적인 의미망을 형성한다. 무정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공간이 지닌 뚜렷한 성격을 보여주는 최초의 소설이다.

무정은 1916년 6월 27일 오후 2∼3시에 경성학교 영어 교사인 이형식이 양반 출신이며 장안의 부자로 소문난 김장로(김광현)의 딸 선형에게 과외공부를 가르치러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선형에게 과외를 가르치고 하숙방에 돌아온 그날 저녁, 이형식의 하숙방에는 영채가 찾아온다. 영채는 고아가 된 형식을 길러준 박진사(박응진)의 딸이자 암묵적인 약혼자다. 그러나 7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박진사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형식의 하숙방을 찾았을 때 영채의 신분은 기생에 불과하다. 미국 유학이 보장된 김장로의 딸 선형을 선택하느냐 은인인 박진사의 딸 영채를 선택하느냐의 그 유명한 삼각관계는 이렇게 탄생하며, 이 삼각관계는 단순하게 연애 상대자를 선택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욕망(선형) 대(對) 의리(영채)’ 혹은 ‘근대(선형) 대 조선(영채)’ 중의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문제와 연결되며, 이러한 고민은 1910년대 지식청년은 물론이고 20세기 이후 한국인의 가장 근본적인 고민에 해당한다고 보아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 삼각관계가 소설의 핵심적인 갈등 구조를 형성한 결과 무정은 자연스럽게 형식의 하숙집(교동), 김장로의 집(안동, 현재의 안국동), 영채의 기생집(다방골, 현재의 다동)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된다. 형식이 근무하는 경성학교는 가상의 학교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할 때, 안동 네거리 근처에 위치했던 휘문의숙으로 추정된다. 무정의 주요 공간은 서울, 그중에서도 조선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북촌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영채가 배학감과 김현수에게 겁탈당하는 청량리의 청량사, 그리고 자살하러 가는 영채와 그 영채를 쫓아가는 형식이 평양행 기차를 타는 남대문 역 등이 작품 속 서울의 주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이미지 크게보기 한 외국인 가족이 북촌의 한옥 골목을 살펴보고 있다.

소설 속의 공간이 지닌 성격은 실제 역사적 공간의 성격과 일치한다. 김장로의 집이 있는 안동은 효자동, 궁정동, 삼청동, 가회동, 계동, 원서동과 더불어 북촌을 형성하며 조선시대부터 양반 관료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다. 영채의 기생집이 있는 다동 역시도 청진동, 서린동 등과 함께 기생이 주로 살던 곳이다.(이존희, ‘조선 시대의 한양과 경기’, 혜안, 2001, 119∼120쪽) 또한 영채가 겁탈을 당한 청량리는 전차로 인해 새롭게 탄생한 교외였으며, 당시에 ‘음부탕자들의 놀이터’(정선태, ‘청량리 또는 ‘교외’와 ‘변두리’의 심상 공간’, ‘서울학연구’ 36호, 2009, 83쪽)로 인식되고는 하였다. 형식은 교동, 안국동, 종로 우미관, 청년회관, 종각 모퉁이, 광통교를 거쳐 영채가 사는 다방골을 찾아가는데 이 여로를 따라 종로 야시(夜市)의 풍경이 자상하면서도 정감 있게 펼쳐진다. 종로 야시는 무정이 연재되기 불과 6개월 전인 1916년 6월 21일부터 열리기 시작했으며, 종로 보신각 앞에서 파고다 공원 앞까지에 이르는 거리가 주요 무대였다. ‘시가의 은성(殷盛)’과 ‘내선인의 화충협동(和衷協同)’을 위해 열리기 시작한 종로 야시는 밤마다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유인혁, ‘식민지 시기 근대소설과 도시공간’, 동국대 박사, 2015, 222쪽)

영채가 청량리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형식은 신우선과 함께 전차를 타고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간 후에, 그곳에서 전차를 갈아타고 청량리까지 간다. 1899년 4월에 운행을 시작한 경성의 전차는 이미 1911년에는 경성 시내 대부분의 전차가 복선화할 정도로 서울 사람들의 주요한 대중교통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아오야기 쓰나타로, ‘100년 전 일본인의 경성 엿보기’, 구태훈·박선옥 편역, 재팬리서치21, 2011, 140∼143쪽)

이토록 정밀하게 서울의 구석구석을 담아내고 있는 무정이지만 당시 서울 인구의 25%가량을 차지하던 일본인(1914년 당시 서울 거주 일본인 6만6024명, 조선인 18만7236명／아오야기 쓰나타로, 앞의 책, 21쪽 참조)과 그들의 거주구역인 남촌은 작품 속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무정의 조선인들이 접촉하는 일본인은 주로 순사들이다. 김장로가 사는 안동에도, 형식의 하숙집이 있는 교동에도, 형식의 학교 앞에도 모두 파출소가 있다. 조선사학자로 오랫동안 경성에 살았던 아오야기 쓰나타로는 1915년 출판한 ‘최근 경성 안내기’라는 책에서 매우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총독부의 경비 방법은 주도면밀하고 빈틈이 없다”며 이로 인해 “오래도록 암운이 감돌고 침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경성이 갑자기 만사가 확장되고 찬란한 광채를 발산하고 있다”(아오야기 쓰나타로, 앞의 책, 38쪽)며 목소리를 높인다. 실제로 1916년 무렵 북촌을 관리하는 파출소만 18개가 있었으며, 이것과는 별개로 파출소 숫자에 버금가는 헌병주재소가 존재했다고 한다.(위의 책, 199∼205쪽) 1916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인구가 늘어난 2016년 현재 종로경찰서 관내에 13개의 파출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무단통치기라고 불리던 당시에 일제가 얼마나 엄청난 경찰력을 조선에 집중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무정에서 봉건적 가치관과 습속에 젖은 구세대들은 확실한 부정의 대상일 뿐이다. 벼슬과 색시만을 남자가 추구하는 유일한 삶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하숙집 노파, 기생으로서의 봉건 윤리에 찌든 기생집 노파, 평양 칠성문 밖에서 본 ‘낡디낡은 탕건을 쓴 노인’ 등이 모두 그러하다. 벼슬과 색시만 추구하는 이전 사람들과는 달리 월급날이면 금박 박힌 책을 사서 읽기를 즐기는 형식은, 이들에게 ‘더럽고 냄새 나는 물건’ ‘낙오자’ ‘더러운 계집’ 등의 모욕적인 이름을 붙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형식이 ‘순결열렬(純潔熱烈)한 구식여자(舊式女子)’라 칭하는 영채 대신 선형을 선택하는 것도 새로움, 즉 근대에 대한 지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정은 통념처럼 근대(서양, 일본)에 대한 동경만으로 가득한 작품은 아니다. 무정은 근대의 긍정성에 대한 지향과 더불어 근대가 낳은 부정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동시에 보여준다. 세상은 어느새 “돈만 있으면 사람의 몸은커녕 영혼까지라도” 사게 된 ‘돈 세상’이 되었으며, 화려한 물건들로 환한 선형의 집과 어두컴컴하고 볼품없는 영채의 방이 보여주듯이 돈을 기준으로 사람살이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무정에는 돈이 낳은 이러한 부정적 현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곳곳에 나타난다.

무정에서는 표제이기도 한 무정이라는 단어가 총 24번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17번은 영채의 고통스러운 삶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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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영채의 삶을 지칭하는 17번의 무정 중에서 14번이 영채를 대하는 형식의 모습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이때의 무정은 자신을 7년여 만에 찾아온 영채에게 무심했던 형식을, 평양에 내려가서도 진심으로 영채를 찾지 않았던 형식을, 영채를 죽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오히려 즐거워한 형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무정에서 근대의 화신인 형식은 긍정의 대상인 동시에 부정의 대상인 것이다.

삼랑진은 형식을 비롯한 무정의 젊은이들에게 재생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서울은 근대화가 막 시작된 도시로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유한 공간인 동시에 증폭된 개인의 물질적 욕망으로 인해 여러 가지 인간소외를 낳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큰 수해를 입어 ‘개아미’처럼 힘없고 집 잃은 사람들로 가득한 삼랑진에서 우리의 젊은 영웅들은 “개인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공통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영채-형식-선형’의 삼각관계도 들끓는 욕망에 바탕을 둔 애정의 관계에서 따뜻한 연대에 바탕을 둔 우정의 관계로 변모한다. 처음 형식은 선형과 약혼하자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감격하지만, 나중에는 형식 스스로 선형과 자신의 관계를 ‘오라비와 누이’라고 반복해서 규정한다. 4년 후의 상황을 담고 있는 후일담에서조차 형식과 선형이 결혼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무정의 그 유명한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라는 결말에 나오는 ‘무정한 세상’ 이후의 ‘유정한 세상’은 전근대 사회의 미몽은 물론이고 근대의 또 다른 미몽마저도 극복한 새로운 세상으로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곳은 서울이라는 근대도시가 지닌 긍정적 가능성과 삼랑진에서 익힌 공감과 연대의 감각이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일 것이다.

이경재 숭실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