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미국의 에너지부(DOE)가 오는 4월 15일부터 우리나라를 ‘민감국가 목록’(SCL)의 ‘기타 지정국’으로 지정·관리한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정치권에서 논란이 뜨겁다. 미국이 굳건한 동맹인 한국을 북한·시리아·이란 등의 테러지원국처럼 대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당장 첨단기술과 에너지 분야의 협력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현실적인 우려도 있다.

이 문제가 한국에서 정쟁으로 비화한 것과 관련, 조셉 윤 주한 미 대사대리는 18일 좌담회에서 유감의 뜻을 밝혔다. 그가 이건 큰일이 아니라며 ‘미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 방문객 중에서 민감 정보를 부주의하게 취급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SCL 문제는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치권이 본질 아닌 외형만 보고 서로 ‘네 탓’ 공방을 한 것은 실망스럽다. 민감국가 지정 자체를 정쟁의 소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야당은 정부가 섣불리 들먹인 핵무기 개발 논의 때문에 발생한 외교 참사라고 목청을 높인 반면, 여당은 야당의 어설픈 반미·친중 성향이 미 행정부를 지나치게 자극했다고 우겼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근거를 내놓지는 않았다.

또 하나, 우리 정부가 지난 1월 초 조 바이든 행정부의 결정을 그동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미국 행정부에서 에너지부는 단순히 에너지 정책만 담당하지 않는다. 에너지부는 국방부·보건복지부와 함께 기초과학과 인공지능(AI)·양자·원자력을 비롯한 첨단 기술 분야 연구개발 사업의 상당 부분을 수행한다. 실제로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17개 국립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과의 국제 협력 강화를 요란하게 외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원자력을 비롯한 에너지 정책을 전담하고 있는 산업통상자원부가 미국 에너지부의 정책 결정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랍다. 우리의 아까운 연구개발비 120억 원을 미국의 연구기관에 일방적으로 퍼주는 것을 국제 협력이라고 착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미국 행정부에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국제 협력은 단순히 과학지식을 증진하고, 인류의 복지 향상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미국에 첨단 과학기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관세보다 훨씬 더 유용한 ‘협상 카드’라는 뜻이다.

SCL은 에너지부 산하 연구기관의 국제 협력을 관리하기 위한 내부 규정이다. 미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국가와의 협력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미 에너지부의 SCL로 지정됐다고 해서 야단법석을 떨 이유는 없다. 우리도 미국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원자력·조선·반도체·자동차 기술은 미국이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스라엘과 대만이 민감국가임도 주목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SCL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지정됐다가 1994년 7월에 우리의 요청으로 목록에서 제외된 적이 있다. 미국이 우리를 SCL로 지정한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실무적으로 조용하게 해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산업부 장관이 미국 에너지부 장관에게 읍소해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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