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총선과 ‘강대국 중심주의’ 뉴노멀

이경수 前駐독일 대사

지난 23일 치러진 독일의 조기 총선 결과 중도우파 기민당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대표가 이끄는 기민-기사 연합이 제1당을 차지하고 3년 만에 정권 재창출을 이루게 됐다. 그보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전후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주류 정당인 사민당을 제치고 제도권 내 제2당으로 확고히 부상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유럽의회 선거와 독일 지방선거를 통해 예견되긴 했지만, 우파 정당들의 약진은 지난 1월 20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의 귀환으로 부각된 경제 구조의 취약성과 이민·국경 문제가 촉발한 자국 우선주의가 독일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0년대 제조업과 수출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구가한 독일은 국제경제의 패러다임 변화와 미·중 경쟁 등 지정학적 변동 속에서 디지털·기술 중심 경제 선진화에 뒤처져 2019년 이후에는 저성장과 경쟁력 약화에 직면했다. 특히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 가격 상승과 안보 불안이 대량 난민 유입에 따른 사회 불안과 겹치면서 대중의 관심사를 기후변화 등에서 경제·안보·이민 등 현실 문제로 바꿨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신속한 러-우 전쟁 종전 협상과 유럽의 참여 배제 △미국의 유럽 방위에 대한 책임 이전 요구 △러시아와의 무리한 화해 추진 △관세 부과와 같이 피아를 가리지 않는 일방주의도 대서양동맹에 대한 미국의 공약과 미국 없는 유럽 안보 및 나토(NATO)의 장래에 대한 본질적 고민을 선거 의제로 등장시켰다.

기민당은 유럽연합(EU) 탈퇴, 마르크화 재도입 등 극단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AfD와는 공식적으로 거리를 두지만, 난민 문제에서는 엄격한 국경 제한을 주장하는 AfD 지지층의 정서를 흡수해 선거를 전략적으로 유리하게 이끈 것으로 분석된다. 차기 총리가 될 메르츠 대표는 기민당 내 환경·이민·에너지(탈원전) 등 중도좌파적 의제를 수용하고 대(對)러시아 포용·유화 정책을 편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에 비해 좀 더 선명한 우파 노선을 견지하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런 측면에서 불법 이민자에 대한 강력한 통제, 국방비 인상, 힘을 통한 평화 등 트럼프의 이념이나 정책과 공통 부분이 있다.

한편, 개표가 진행되던 중 그가 미국이 유럽의 운명에 무관심하다는 게 분명해졌다며 “가능한 한 빨리 유럽을 강화하고, 단계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루겠다”고 언급한 점으로 보아 독일이 미국 안보와 분리(decoupling)된 유럽의 독자 안보 또는 주권 강화 과정에 중심이 될 것으로 이해된다.

전후 주류 정당이 극우와 협력하는 것을 막는 ‘방화벽’ 전통 유지를 언명한 메르츠 대표가 앞으로 사민당과의 대연정 또는 제4당을 포함한 3당 간 연정 협정을 추진하면서 노선 타협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럽 경제력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독일의 위상과 유럽 내 의사결정 구조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어떠한 경우든 앞으로 독일이 취할 대내외 정책은 무게감이 있다. 일부 전문가가 진단하듯이 국제사회가 강대국 중심주의로 회귀하고 유럽에서 얄타체제 2.0으로 지정학의 회귀가 이뤄진다면 세력권이 재편된 유럽은 러시아와 독일의 세력 균형 무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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