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 정문헌종로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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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의 출발점은 ‘무정부 상태(Anarchy)’다. 국가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지켜내야 하는, 힘의 원리가 작동하는 자조(自助·self-help) 체제에서부터 모든 논의가 시작된다.

냉전 시기 미·소 양극체제와 탈냉전기 미국 중심 유사일극체제(quasi-unipolar system)를 거치면서 세계 질서는 동맹, 국제 레짐(regime) 등으로, 일견 ‘자조’의 세상을 벗어나 나름의 균형과 안정을 향해 나아가는 듯 보였다. 우리나라도 동맹국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적 성장과 군사 안보의 편익을 누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자비’를 잃어버린 패권국의 재등장과 중국의 지역 패권 야욕은 수많은 국가들이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자조 체제 안에서 다시 각자의 생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실을, 국제관계의 ‘무정부 상태’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잔혹한 제국주의로 들끓었던 구한말 역시 무정부 상태였다. 세계열강은 조선을 두고 치열한 ‘아귀다툼’에 혈안이었다. 우리는 국제관계의 본질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준비도 힘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탐욕의 민낯을 지켜보는 것뿐이었고 대가는 참혹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며,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돌아왔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점령, 덴마크령 그린란드 매입, 캐나다의 미국 51번째 주 편입, 연이은 보편·상호 관세 정책 등 동맹관계를 거스르는 자국 중심주의로 벌써 자유주의적 국제 레짐의 ‘붕괴’ 신호가 선명하다. 게다가 취임 직후 ‘사실상 핵보유국(de facto nuclear power)’으로서 북한을 평가한 점, 최근 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원칙을 재확인하면서도 ‘북한 김정은과의 관계 구축’을 분명히 한 것은, 추후 북·미 협상을 통해 핵 동결 수준의 ‘스몰 딜’ 가능성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즉, 전쟁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를 뒤로하고 러시아와 휴전·종전 협상을 추진한 것처럼, 일본 스스로 큰 성과로 자찬했던 조기 미·일 정상회담이 일주일 만에 관세 폭탄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우리는 철저히 배제된 채 북한의 핵보유 정상국가화가 일방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북핵 문제를 넘어 동아시아에서 우리가 아닌 북한이 주요 행위자로 등장할 개연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시 무정부 상태의 자조 체제 속으로 돌아왔다. 북한의 핵보유 정상국가화와 자유주의 국제 레짐의 파열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선택지가 많지 않음을 의미한다. 힘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부 의존 없이 독자적인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수단을 준비해야 한다. 국가의 생존을 확보하면서 세계 무대에서 강하고 독립적이고 성공적인 행위자로 등극하려면, 우리는 독자적 핵무장을 해야 한다. 물론 자체 핵무장을 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하지만 준비된 자만이 ‘기회의 신’ 카이로스(Kairos)를 잡을 수 있다. 106번째 3·1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하지 못했던, 긴 통한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다가올 100년은 달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