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 어린이 책

못 본 척 못 들은 척 모르는 척
앙드레 풀랭 저자 글│소피 카슨 그림│ 한울림어린이

이미지 크게보기

“부당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억압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라는 데스몬드 투투(1931∼2021)나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다”라는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전언처럼 우리에게는 결단을 하고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비록 불편하고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이 그림책은 아름다운 호숫가에 있는 할아버지의 마을에 “그들”이 오면서 시작된다. 평화롭게 살던 붉은여우들은 털 색깔이 너무 빨갛다는 이유로 잡혀간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붉은여우가 아니니까, 할아버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늑대들은 기름진 땅을 가졌다고, 코요테들은 자신들의 신을 섬긴다고, 사막여우들은 다른 가족 형태를 지녔다고 잡혀간다. 할아버지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 모르는 척한다. 자기들과 똑같아지라고 강요하는 “그들”이 대리석 집에 살던 부자 개였던 할아버지를 잡으러 왔을 때, 할아버지를 도와줄 이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책은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처음 왔을 때’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됐다. 나치 정권의 희생자들을 방관했음을 반성하는 이 시는 시대를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번역됐으며 침묵하는 자가 다음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붉은여우, 늑대, 코요테, 사막여우, 개들이 폭력과 억압을 숨죽여 외면하는 대신, 손을 잡고 서로를 지켰다면 호숫가 마을은 명예롭고 고귀한 다음 장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고함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다”라고 했던 마틴 루서 킹(1929∼1968)을 상기해본다. 아동문학은 어리고 희망찬 세대가 불의와 무력 앞에서 존엄과 자유를 위해 신념을 갖고 행동할 수 있도록 정직하고 정의로운 지평이 되어줄 것이다. 48쪽, 1만7000원.

신수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