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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과 의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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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을 출간했다. 소식을 들은 지인들에게서 축하의 메시지보다 먼저 나오는 것은 “또?”였다. 매년 책을 내니 그 동력이 궁금한 것이다. “종합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어가야 멈추지”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될 때까지 해보자는 일종의 결핍의 욕망을 말한 것이다. 채워지지 않은 결핍을 메우기 위한 노력이다. 그래서 한 편으로 너무 잘돼버릴까 걱정을 하기도 한다. 이제 써야 할 동기가 없어져 버릴 테니. 잘 팔리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그럴까 봐 무서워하다니, 얄팍한 양가감정의 외줄타기를 하며 소설가 이승우의 ‘고요한 읽기’(문학동네)를 읽었다. 오랜만에 읽는 쫀득하고 팍팍한 밀도의 하드 에세이였다.

에세이에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다시 한 번 읽어 생각하고, 메모를 적으면서 잘 익은 수육을 씹어 먹듯이 읽어나갔다.

오랜 기간 가능성이 있는 작가를 평할 때 듣는 ‘대기만성’이란 단어에 대해 깊은 사유로 들어가는 장이 있었다. 저자는 대단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도 같은 일을 하면 주변이 의아해하며 그 이유를 큰 그릇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큰 욕망을 가진 사람은 타오르는 불길과 같아서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큰 욕망은 사람을 화급하게 하고 결실이 나타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성과 없이도 꾸준히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목적이 아니라 ‘그저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렬한 욕망이 없기에 이루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고 그만두지 않는다. 진득하게 반복해서 일을 한다. 그러다 혹시 큰 그릇이 된다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일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꾸준함’이다. 잘하기 때문에, 잘하려고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이니 계속하는 것이다. 계속하게 하는 힘은 만족하지 못함이다. 모자람을 채우려 다시, 더 하게 한다. 꾸준함은 성향이 아니라 만회하려는 의지에서 비롯한 행위의 반복이다. 내가 한 일에 대한 불만족이 동력이 된다. 꾸준히 쓰는 사람은 여전히 만회하지 못한 사람이다. 호의적 평가를 당연한 보상이 아니라 행운이라 여겨야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명성은 한 일에 만족하게 만드니 독이 된다. 보상은 ‘뜻밖의 사건’이어야 한다. ‘뜻안’의 보상은 아무리 커도 마땅하다 여기게 된다. 뜻밖일 때 놀라고 즐겁다. 큰 그릇은 목적이 아니라 그냥 하다 보니 생기는 결과물이다. 하던 일은 묵묵히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뭔가 이루어진다면 행운에 놀라거나 우연에 감사하면 된다. 보상은 그걸 연연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보상이 된다.

막연히 혼자 이해하던 일의 내적 동기가 열 쪽 안팎의 글을 읽고 명쾌해지고 깊어졌다. 욕망이 채워져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해 더 잘해보려는 것이 반복의 동기였다. 읽고 나니 내가 성실하고 괜찮아 보여 잠깐 마음에 들었다. 좋은 책이 갖는 효용이 이런 것 아닐까. 부작용이라면 그동안 내가 쓴 글의 퀄리티가 부끄러워졌다는 것, 하지만 충분히 감수할만한 부분이다. 부러움과 열등감은 감내할 수 있는 선에서는 적당한 자극제가 되니까.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