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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박경일기자의 여행

녹차마을 낯선 카페, 커피 마시러 왔다가 초록 계단에 빠지다

박경일 전임 기자
박경일 전임 기자
  • 입력 2024-03-21 09:10
  • 수정 2024-03-2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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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이미지 크게보기 하동군 화개면 정금리의 정금차밭. 차밭의 이랑 저 아래로 지리산에서 발원한 화개천이 흘러내린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꽃 없이도 봄 만끽… 경남 하동 화개 차밭

소박한 정취 시골 마을에 언밸런스한 카페 들어서
동네선 처음엔 경계했지만 오히려 젊은층 유입 효과
차밭 풍경에 매료된 상춘객, 다원 찾아 차까지 마셔
호젓한 천년다향길 걷기코스·화개천 드라이브 일품


하동=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봄나들이 인파가 심상치 않습니다. 가장 먼저 봄축제의 서막을 연 섬진강 변 꽃축제에 행락객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말이야 뭐 그러려니 하는데, 평일에도 나들이 인파로 도로가 온통 주차장을 방불케 합니다. 다들 이번 봄에는 꽃놀이를 놓치지 않기로 한 모양입니다. 아무리 봄꽃이 좋다지만, 모처럼 나선 길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진 차량 정체에 갇히거나,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뒤에 서보면 후회가 물밀듯 밀려옵니다. 그래서 ‘봄꽃 없을 때의 여행’을 제안합니다. 목적지는 경남 하동 화개의 차밭입니다. 여행하는 시기는, 매화는 지고 벚꽃은 아직 피기 전. 아니면 십리벚꽃길의 벚꽃이 분분히 지고 난 뒤. 화개의 벚꽃길은 100년이 채 안 됩니다만, 꽃이 핀다는 뜻의 화개(花開)란 이름은 그보다 더 까마득하게 오래된 지명입니다. 어디 벚꽃만 꽃이겠습니까. 지리산 아래 화개에서는 초록의 차밭과 발밑의 작은 풀꽃들로 봄의 정취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답니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대형 카페 ‘더 로드 101’. 젊은이들을 차밭으로 끌어들인 수훈갑이다.



# 오래 머물겠다면 하동의 차밭

차(茶)로 이름난 명소에 왔으니 ‘이런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부터. 따분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꼭 알아둘 얘기’만 짧게 하고 지나간다. 우리나라에 차는 언제, 어떻게 유래됐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완전히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때 당나라로 해외출장을 다녀온 신하 ‘대렴(大斂)’이 828년 차나무 씨앗을 가져왔는데, 흥덕왕이 그걸 지리산에 심게 했다고 적혀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차 씨앗 얘기는, 이보다 780여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가락국 시조의 왕비인 아유타국의 허황옥이 차 씨앗을 가져왔다’는 기록이다. 뭐가 진짜냐고? 어떻든 상관없다. 경남 하동의 지리산 아래 화개면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차 문화의 중심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니까.

경남 하동, 그중에서도 지리산 아래 화개면은 차의 뿌리이자 중심이다. 화개천 물길 양옆으로 온통 차밭이다. 쌍계사로 드는 천변 길옆에 ‘차나무 시배지(始培地)’가 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하 대렴이 차 씨앗을 처음 심었다는 자리다. 여기 심어진 차 씨앗 한 알이 1200년이 지나 화개골 전체를 뒤덮은 차밭이 된 셈이다.

하동사람들은 화개의 차를 ‘야생차’라 주장한다. 야생의 개념이 좀 헷갈린다. 인간의 간섭 없이 씨가 퍼져 저 스스로 차밭을 이룬 곳이 없지는 않지만, 하동의 차밭은 대개 차 씨를 ‘심어서 기른’ 것이다. 화개의 차가 야생이란 주장은, 수확 때만 사람의 손이 갈 뿐, 농약은 물론이고 비료도 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생육과정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야생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척박한 땅에 씨앗으로 심어서 조성한 화개의 차밭을, 1940년대 일본인들이 일본 차종인 ‘야부기다’와 인도산 차종인 ‘베니오마레’를 대규모로 심어 기업형으로 일구고 기계식으로 재배하는 전남 보성 차밭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천년고찰 쌍계사 뒤쪽의 외딴 산중에 자리 잡은 수행처 ‘사관원’.



사실 맛으로는 그게 하동의 차인지, 보성의 차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경관과 분위기가 드러내는 두 곳의 차이는 명확하다. 각자 독특한 미감이 있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쉽잖다. 보성의 차밭이 조형적이고 매끄러우며아름다운 쪽이라면, 화개의 차밭은 정반대로 수더분하고 소박하다. 보성의 차밭이 ‘이미 만들어진’ 미감을 나눠 갖는 쪽이라면, 화개의 차밭은 시선을 바꿔가며 스스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야 하는 곳이다.

숙고 끝에 내린 적합한 여행지에 대한 나름의 결론이 이렇다. ‘차밭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짧다면 보성이 더 낫고, 오래 머물거나 걷고 싶다면 화개의 차밭이 한 수 위다.’

# 차밭에서 경관을 소비하다

이즈음 화개의 차밭에는 젊은이가 많다. ‘차’라면 고리타분한 중년의 아저씨부터 떠올리던 젊은 세대가, 조금씩 차를 가까이하는 것이다. 요즘 같은 봄날에 화개의 이름난 차밭에서는 사진을 찍거나 찻잔을 앞에 놓은 젊은이를 쉽게 볼 수 있다.

화개에서 차를 따고 덖는 다원 주인들은 이렇게 된 데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첫 번째 계기는 바로 코로나19’였다.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화개골을 드나들었던 건, 예외없이 지리산을 찾은 등산복 차림의 중년들이었다. 봄이면 쌍계사 벚꽃길에 관광객이 반짝 몰려들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던 곳이다. 그랬던 곳에 하나둘 젊은이들 모습이 목격되기 시작한 게 코로나19 때였다. 되도록 사람이 없는 여행지만 골라서 조심조심 여행하던 때, 젊은이들은 호젓한 화개로 들어와서 차밭을 발견해냈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고 신춘호 농심 회장의 시주로 2007년 조성한 쌍계사의 금강계단.



“지내놓고 보니, 코로나19가 큰 기회였어요. 이른바 ‘사회적 거리 두기’ 시절, 젊은이들이 한적한 차밭에 들어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게 시작이었지요.”

화개에서 8대째 차를 재배하며 27년째 차 덖는 솥을 잡고 있다는 오재웅(45) 도심다원 대표의 설명이다. 화개 일대에는 줄잡아 100여 개의 다원이 있는데, 차를 덖고 있는 다원 주인들은 대부분 환갑을 넘은 나이. 막내 격인 오 대표는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챘다. 다원에 찻집을 내고 차밭 한가운데 정자와 삼각 캐빈 등 근사한 공간을 조성해 명소로 만든 것도 변화를 일찍 읽은 덕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도심다원에서는 다기세트와 커피포트 등을 담은 ‘차 바구니’를 대여해준다. 이용자들은 그걸 받아 원하는 공간에 자리를 펴고 1시간 동안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차 바구니 대여료는 2인 기준 2만5000원. 싸지 않은 가격임에도 차값이라기보다는 독점적 사진찍기 공간 대여비용쯤으로 여기는 젊은이들의 예약이 쏟아진다. 요즘 같은 봄날의 주말이면 몇 주 전에 예약이 꽉 찬다.

“차가 아니라 경관을 소비한다고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젊은이들에게 차를 접하게 하는 좋은 기회잖아요. 경관을 소비하러 왔다가 차 맛을 알게 된다면 그것만큼 보람있는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photo이미지 크게보기 차밭으로 그득한 화개천 변에 들어선 대형 베이커리 카페 ‘더 로드 101’의 내부.



# 커피가 차밭에 청춘을 데려오다

흥미로웠던 건 화개에 젊은이를 불러들인 ‘두 번째 계기’다. 화개천 변에는 이런 시골과 잘 어울리지 않는 대형 베이커리 카페 ‘더 로드 101’이 있다. ‘더 로드 101’은 2층짜리 카페 본관과 별관인 단층짜리 길 정원, 그리고 1만1900㎡(3600여 평)의 정원으로 이뤄진 거대한 카페. 2층 창 가득 햇볕이 쏟아지는 카페 안에는 연못까지 조성해놓았다. 차밭을 경관으로 누리지만 카페 메뉴에 차는 없고 커피가 주축이다.

화개에 처음 ‘커피 파는 카페’가 문을 열었을 때 적잖은 소동이 있었다. 20여 년 전쯤의 일이다. 녹차밭 한가운데 커피숍이라니…. 다원을 운영하는 이들은 어처구니없어했고, 더러는 화를 냈다. ‘경쟁업체가 남의 영업집 바로 앞에 가게를 차린 경우’를 대하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곧 그런 정도의 관심도 필요 없어졌다. 문 연 커피숍이 줄줄이 망해나갔기 때문이었다. 카페를 드나들 법한 젊은이들이 벚꽃 피는 봄 말고는 화개까지 아예 들어오지 않았을 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 로드 101’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도, 주민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저러다가 또 문 닫고 나가겠지…”란 반응이 대세였다. 카페 규모가 커서 고정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더 빨리 망할 수 있다고 점쳤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웬걸. 베이커리 카페는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북적거렸다. 주말이면 하루 카페를 찾는 손님이 2000명을 넘는다. 화개면 인구는 2853명. 카페를 찾는 하루 손님이 화개면 전체 주민 수에 육박한다.

처음 커피숍 개업 시절의 시선으로 생각한다면, 차밭 코앞에서 커피가 불티나듯 팔리는 ‘모욕적인 일’이 일어난 셈이었다. 전쟁이라도 벌어졌을 법했는데, 상황은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차밭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발견한 젊은이들이 하나둘 화개의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경쟁적으로 더 멋진 차밭을 발견해내곤 그걸 사진에 담아 줄줄이 SNS에 올렸다. 그 사진에 매료된 젊은이들이 뒤를 이어 찾아든 건 물론이었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화개천 변의 차밭에 딸린 운치 있는 숙소.



경관을 따라 다원까지 들어온 젊은이들은 차 맛을 보게 됐고, 차를 만들어 파는 다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실 대형 카페를 가는 목적도 ‘커피’보다는 경관과 분위기 때문이었으니, 분위기만 좋다면 거기서 마시는 게 커피가 아니라 차라 해도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실 화개의 다원은 오래전부터 손님들에게 차를 공짜로 내줬다. 차를 팔기 위해 차 맛을 보여주는 ‘시음’의 개념이었다. 차 맛만 보고 안 사고 나온대도 눈총을 주는 일은 없었다. 화개에서 차는 손님들에게 푸근한 인심처럼 내주던 것이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돈을 내기도, 그렇다고 안 내기도 어정쩡한 이런 상황을 영 불편해하는 손님들을 겨냥해 근래 화개에 ‘돈 받고 차를 파는’ 찻집이 부쩍 늘어났다.

# 차밭 이랑을 걷다… 천년다향길

오 대표에게 물었다. “꽃 없을 때, 여행 온 이들은 화개에서 무얼 해야 하나?” 오 대표의 대답. “아무 데나 앉아보라.” 그는 봄날의 화개에서는 어디든 앉기만 하면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고 했다. 화개천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길도 좋거니와 앉을 자리도 지천이다. 화개천을 왼쪽으로 끼고 들어서는 길가에 구멍가게가 있다. 간판이 ‘길할 길(吉)’ 자에 ‘아름다울 가(佳)’ 자를 써서 ‘길가슈퍼’다. 슈퍼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작은 구멍가게인데, 낡은 간판에 올린 상호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 길이 가장 아름다운 때가 바로 이즈음이다.

화개에는 차밭을 끼고 이어지는, 봄에 걸으면 기가 막힌 길이 있다. 이름하여 ‘천년다향길’이다. 길은 1코스와 2코스가 있다. 1코스는 차 시배지에서 시작해 쌍계초를 거쳐 만수제다 차밭과 관아다원 차밭까지 이어진다. 2코스는 정금마을 차유통센터에서 시작해 도심다원을 거쳐 신촌마을을 거쳐 차 시배지까지 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길은 벚꽃 시즌이면 북새통을 이루는 십리벚꽃길 물 건너편으로 이어져 호젓하다.

두 코스 모두 편도 4㎞로 다 걷자면 1시간 30분 남짓 소요되는데, 군데군데 차밭 구간만 걷는 것도 괜찮다. 두 코스 중 추천하는 건 2코스다. 길은 화개천의 물길을 굽어보면서 차밭의 이랑을 따라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그 길 위에는 모든 게 다 봄이다. 초록의 차밭부터 스치는 바람과 발밑의 들꽃까지…. 거기 봄 아닌 건 아무것도 없다. 벚꽃이 다 지고 난 뒤에 고즈넉해지는 때를 택하면 더 좋겠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식당가를 지나 쌍계사로 들어가는 옛길 입구의 바위에 새겨진 ‘쌍계석문’ 글씨. 최치원의 필적이라고 전해진다.



화개천 물길을 거슬러 드라이브하면서 빼어난 경관의 다원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정금차밭은 차나무가 그려내는 우아한 곡선과 차밭 위의 정자가 인상적인 곳이고, 화개골에서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있는 명원문화재단 차밭은 바위투성이 산속의 야생차밭 위에 나무 덱을 놓아 산책로를 조성해 색다른 분위기 속에서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이번엔 숙소에 대한 제안. 화개의 차 시배지 옆에는 켄싱턴리조트 지리산 하동이 있다. 리조트가 있을 것 같지 않은 뜻밖의 자리다. 차밭을 두르고 있는 리조트는 쾌적하고, 무엇보다 고요하다. 압권은 객실에서 내다보이는 차밭과 화개천의 풍경. 객실 테라스 야외공간에 편백나무로 짠 욕조를 설치한 디럭스 스파 객실을 추천한다. 야외공간의 스파에 몸을 담그고 편백 향을 맡으며 낮에는 차밭과 화개천을 내려다보고, 밤에는 쏟아질 듯한 별을 올려다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스파 객실에는 다구와 함께 차가 제공된다.

# 언제 마시는 차가 가장 좋을까

오 대표는 또 ‘화개에 오면 어디서든지 꼭 차를 마셔보라’고 했다. ‘차를 만드는 이들이 찻잔 안에 봄을 넣어 두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차를 마시라는 건 바로 그 봄을 만나보라는 얘기일 터. 경관이 꼭 훌륭한 곳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저 마음이 가는 찻집에 가서 차를 한잔 맛보라는 얘기다.

화개의 차밭에서 찻잎을 따려면 아직 한 달쯤 남았다. 첫 차를 따는 게 곡우(4월 19일) 무렵이다. 차를 따서 덖고 말리는 데 일주일쯤 걸리니, 햇차는 일러도 4월 말이나 5월 초쯤 맛볼 수 있다. 갓 수확한 찻잎으로 만든 첫 차를 최고로 치지만, 숙성된 차도 나름의 맛이 있으니 품질의 우위로 볼 일은 아니다. 굳이 햇차가 나오는 때를 기다렸다가 가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오히려 햇차가 나오기 전에 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화개의 다원은 차를 만드는 4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다. 한 해 동안 팔아야 할 차를 한 달 사이에 만들어야 하니 왜 안 그럴까. 수확한 찻잎을 그때그때 덖고 말려야 하니 수면 시간은 서너 시간에 불과하다. 찻잎을 유념하거나 덖는 일이 워낙 섬세한 공정이어서 신경도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다. 그러니 다원에서 손님 대접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다원에서 불친절을 경험했다면 혹시 한창 차를 만들던 때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자.

photo이미지 크게보기 화개천 변의 ‘길가(吉佳)’슈퍼. ‘상서롭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경험으로 미뤄보면 가장 좋은 건 차를 다 만들고 난 뒤에 가는 거다. 차를 다 만들고 홀가분해진 주인들로부터 친절한 응대와 푸근한 인심을 경험하게 될 확률이 100%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건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의 개최 시기다. 올해 축제 개막일은 5월 4일. 다원이 연중 가장 바쁠 때다. 모름지기 차 축제라면 차를 만드는 이들의 축제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해 차 만들기를 마무리하는 5월 말쯤 하는 게 진짜 축제가 아닐까.

# 지리산 유람객이 화개를 찾은 이유

지리산 아래 화개는, 지금은 ‘십리 벚꽃’으로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오래전에는 지리산 유람에 나선 선비들이 빼놓지 않고 찾았던 명소였다. 조선 시대, 지리산 유람의 행로나 목적은 대략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천왕봉을 겨눠서 ‘등산’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동의 화개동과 삼신동 계곡 일대를 둘러보며 소요하는 것이었다.

지리산 유람의 공간이 하필 화개였던 건, 중국의 무릉도원에 비유될 정도의 경관도 경관이지만 무엇보다도 그곳에 신라 때 최치원의 자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 후 풍운의 뜻을 품고 귀국했으나 신분제의 한계와 말기적 폐단을 드러내고 있는 현실과 맞닥뜨려 줄곧 방랑하다가 여기 화개골과 삼신동 계곡에 마지막 자취를 남기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쌍계사 입구 식당가에서 절집으로 오르는 길의 ‘쌍계(雙溪)’와 ‘석문(石門)’ 석각과 지금 보수공사 중인 진감선사대공탑비의 글씨가 최치원의 것이다. 불일폭포에도 최치원이 책을 읽으면 폭포 아래에서 용이 나왔다거나 학이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명원문화재단 차밭 아래 화개초 왕성분교 정문 옆에 서있는 푸조나무 노거수는 최치원이 지리산에 들어가면서 꽂아두고 간 지팡이가 살아난 것이란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분교 앞 화개천 계곡의 세이암(洗耳암)도 최치원이 수정같이 맑은 화개천 물에 귀를 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차 시배지 너머 차밭 사이에 들어선 켄싱턴리조트 지리산 하동.



쌍계사야 내로라하는 이름난 절이니, 다 아는 얘기는 줄이고 미처 못 보거나 모르고 지나가기 쉬운 것에 대해 얘기해보자. 쌍계사는 뜻밖에 새로 세운 것이 적잖다. 천년고찰에 새로운 불사가 거슬릴 법한데 새것이 옛것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크게 어색함이 없다.

절집 마당에 월정사의 것을 빼닮은 쌍계사 구층석탑이 있다. 제법 세월이 묻어 보이는데, 실은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 3과와 암자 국사암에서 발견된 사리 2과를 넣어 1990년에 지은 것이다. 대웅전 뒤 금강계단도 2007년 고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시주로 만든 것이고, 금강계단 뒤 마애삼존불도 이듬해 신 회장의 시주로 조성한 것이다.

근래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금강계단의 비천상도, 삼존불을 깎은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대웅전에서 공사 중인 적묵당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낮은 흙담에는 깨진 기와를 넣어 만든 꽃문양과 글씨가 아름답다. 팔상전 아래 청학루의 다듬지 않고 세운, 저마다 크기와 굵기가 다른 참나무 기둥 12개도 눈여겨보자.

마지막으로 쌍계사 이야기를 하면서 꺼내놓을까 말까 망설였던 얘기 하나. 쌍계사 뒤쪽의 깊은 산중에는 비밀처럼 숨어있는 수행처가 있다. ‘사관원’이라 부르는 곳이다. 본래 ‘옥소암’으로 불리던,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암자인데 여길 물으면 쌍계사의 스님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닫는다. 선방스님의 수행처로 숨겨두려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자연 속에 찍은 작은 점처럼 느껴져서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수행이 되는 듯한 공간이다. 가는 길은, 말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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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의 재첩국은 5월에

하동을 대표하는 먹거리는 대부분 섬진강에서 나온다. 섬진강에서 잡아낸 재첩으로 끓인 재첩국이나 참게로 끓인 참게탕이 대표적이다. 하동에서는 재첩을 ‘갱조개’라 부른다. 그래서 하동사람은 재첩국도 ‘갱조갯국’이다. 섬진강에서 재첩이 나기 시작하는 건 4월 중순부터. 5월에 접어들어야 본격적으로 잡는다. 이즈음 식당에서 내는 재첩국은 작년 봄에 잡자마자 삶아서 껍질을 깐 뒤 급속냉동해 보관한 것이다. 급랭하면 맛의 차이가 별로 없다지만, 그래도 제철 재첩국의 맛에 견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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