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정월 대보름인 지난 24일 경북 청도군 화양읍에서 이배 작가의 점화로 달집태우기 행사가 열렸다. 이날 달집태우기 과정을 담은 영상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비디오 설치작 ‘버닝’으로 상영된다. 조현화랑 제공

■ 이배 작가 ‘베니스 비엔날레’서 개인전

밤하늘 아래 타오른 청도 달집
영상에 담아 ‘버닝’으로 탄생
빔 활용 21m 대형화면서 상영

달집이 남긴 ‘숯’을 도료 삼아
친환경종이에 ‘붓질’도 선보여
“서양, 동양 이해하는 기회되길”

둥그런 달은 풍요를 상징한다. 한국인에게 새해 처음으로 떠오른 대보름달을 맞이하는 날은 유독 각별하다. 오곡찰밥을 입에 담으며, 걱정 없이 넉넉한 한 해를 비는 정월 대보름은 가가호호 함께하는 축제다. 이 정월 대보름의 백미는 ‘달집태우기’다. 청솔가지를 베어다 세우고 짚단을 주위에 새끼줄로 붙들어 맨 달집에 나쁜 기운을 보내고 복을 불러오는 송액영복을 적어넣은 한지를 묶어 태우는 민속의례다. 온갖 부정과 사악을 살라버리는 정화의 힘이 달집을 고루 잘 태우는 순간, 한국에선 풍요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갑진년 정월 대보름인 지난 24일에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달집이 타올랐다. 이 중 경북 청도군에서 열린 행사는 좀 더 특별했다. 커다란 달집과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소원이 적힌 한지에 불이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이 광경은 청도에서 태어난 한국 현대미술 거장 이배(67)가 영상으로 담았다. 전통 한복 차림을 하고 직접 달집에 불을 붙인 이배 작가는 거센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달집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불길이 달빛 밤하늘 높이 타오르다 이튿날 아침 숯만 남는 순간까지 전 과정을 담아 ‘버닝’(Burning)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이 설치 영상 작품은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4월 개최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미술 애호가들에게 소개되는 것이다. 작업을 준비한 이배 작가는 전통 세시풍속 달집태우기를 현대미술로 탈바꿈시키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제가 하는 게 동양을 이해하는 하나의 코드가 되면 좋겠습니다.”

120년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축제로 꼽히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올해 K-미술을 알리는 장(場)이 된다. 본 전시에 4명의 한국 미술가가 이름을 올렸을 뿐 아니라, 이와 연계해 한국 미술의 흐름을 짚어보는 공식 부대전시가 6개나 열리기 때문이다. 이 중 하나가 베니스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4월 20일부터 열리는 이배 개인전 ‘달집태우기’다. 한솔문화재단 뮤지엄산과 빌모트 파운데이션이 공동 주관하고 부산 대표 갤러리인 조현화랑이 후원해 이탈리아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 발렌티나 부찌가 기획한 이 전시는 ‘순환’을 주제로 한국의 문화가 전 세계인과 만나는 접점이란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배는 해외 미술계가 인정하는 작가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30여 년간 ‘숯’이라는 독특한 재료와 흑백의 서체적 추상으로 만든 한국적인 회화를 선보여 ‘숯의 화가’로 불린다. 나무가 타버리고 나서도 새로운 쓸모를 발견하는 숯에서 나온 순환과 나눔의 개념은 드로잉, 캔버스, 설치 등 여러 형태로 확장돼 왔다. 지난해 한국 작가 최초로 미국 뉴욕 맨해튼의 심장부인 록펠러센터에 6.5m 높이의 숯 더미 형상 조각 ‘불로부터’를 전시해 미술계 이목을 끌기도 했다.

숯의 예술에 영감을 준 건 어린 시절 고향 청도에서 경험한 달집태우기다. 농업의 순환성을 내포한 달집태우기 의례는 그 자체로 자연과 사람의 대립을 해소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이배의 ‘순환, 반복’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이질적인 문화가 하나로 이어지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서양에서도 깊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자신의 예술적 기반이 되는 달집태우기 영상작품을 베니스로 가져가는 이유다. 이배 작가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면서 “동양에서 세잔과 모네를 공부하듯이 겸재(정선)와 추사(김정희)의 세계를 서양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전시는 천체를 주시하며 지켜온 민속의례와 전통을 기념하고 자연의 호흡을 되짚는 과정을 밟는다. 7대의 빔프로젝터를 활용해 가로 21m의 대형 화면에 상영되는 버닝으로 시작한다. 공간으로 들어가면 짐바브웨의 검은 화강암을 깎아 한국 전통 서예의 먹이 가진 농담과 명상을 형상화한 ‘먹’이 서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이배, ‘붓질’, 2022, Charcoal ink on paper. 조현화랑 제공

청도의 달집이 남긴 숯을 도료 삼아 이탈리아 파브리아노 지역의 친환경 제지를 한국 전통의 배접 방식으로 담아낸 ‘붓질’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눈에 담았던 정월 대보름의 달빛을 연출한 구조물 ‘달’이 관람객이 나가는 길을 비추며 전시의 대미를 장식할 계획이다. 이배 작가는 “거대한 수묵의 세계의 정신성을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