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구상 시인. 딸 구자명 소설가 제공

■ 그립습니다 - 시인·언론인 구상(1919∼2004)

학부 시절에 몇 학기 구상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는 했지만, 선생님이 너무나 경외스러워 질문도 감히 할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하시는 말씀을 받아적으면 그대로 사상서에 나올 법한 명구였다. 언어로써 이 우주의 영원회귀의 법칙을 전파하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죄인이 된 것 같았고, 주눅이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말의 화려한 치장에 현혹되지 말고 사물의 존재론적 깊이를 깨닫고 설파할 줄 알아야 진정한 시인이 된다고 말씀하시면 죽고 싶을 따름이었다. 등단할 자신도 없었고 언의의 순교자가 될 자신은 더더구나 없을 때였다.

이미지 크게보기 나(이승하 시인·왼쪽)는 젊은 시절 서울 여의도 구상 선생님 자택에서 선생님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시인의 길을 배웠다.

대학원생이 되었을 때 조교를 해보라고 학과장 신상웅 교수님이 말씀하셔서 경기 안성에 있는 캠퍼스로 1년 동안 출퇴근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구상 선생님이 강의하러 오시는 날, 점심을 함께할 교수님이 없어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을 하게 되었다. 선지해장국을 좋아하셔서 꼭 그것만 드셨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다른 것을 시키기가 무엇하여 나 또한 그것만 먹었다. 지금에야 고백하는데 그때 그 음식에 질려버려 그 이후로는 먹지 않게 되었다.

‘내리’라는 곳에 있는 식당에서 학교로 돌아오려면 비탈길을 올라와야 하는데 선생님은 그 길을 두세 걸음 걷고 손을 내저었다. 먼저 올라가서 사무를 보라 하시곤 천천히 가겠다고 하셨다. 그다음 주에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폐결핵 3기까지 갔었고 일본에 가서 큰 수술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한쪽 폐를 도려냈다는 것을. 비탈길을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이 백지장이 되는 것이었다. 아파트에 사는 선생님께서 전기가 나가면 모든 약속을 취소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어느 날엔 별안간 오전 수업을 못 하게 되었다. 학교 본부에서 축제 때라고 수업을 안 하는 것으로 뒤늦게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내게 “나, 데이트 좀 하고 올게”라고 말씀하시곤 얼굴에 서글픈 미소를 띠고 과사무실을 나가셨다. 경기 안성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는 아내 서영옥 데레사의 묘소에 다녀오신 것이었다. 돌아오신 선생님께 “선생님, 데이트 어땠어요?” 하고 농담 삼아 여쭤보았더니 “좀 씁쓸했어!”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 모시고 점심을 할 때, 식사가 나오는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식사하는 내내 침묵만 지키는 것도 어색했다. 나는 이것저것 선생님께 질문을 드렸다. ‘응향 사건’에 대해, ‘적군묘지 앞에서’란 시에 대해, ‘초토의 시’ 연작에 대해, 중광스님과 이중섭 화가에 대해, 수업시간에 말해주셨던 오상순 시인에 대해, 고향 원산에 대해, 일본에서의 유학 시절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내가 여쭤보지 않은 당신의 어머니와 형에 대해 말해주셨다. 나의 어머니에 대해, 형에 대해 질문하시기에 답변했더니 북한에 두고 온 당신의 어머니와 북한에서 사제였던 형에 대해 말해주시는 것이었다. 석사 학위를 받고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두 군데 문예지와 두 군데 신문사에서 선생님을 인터뷰하려고 전화를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를 지목해 인터뷰어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월차를 내고 여의도에 있는 서재인 관수재로 소형녹음기를 들고, 사진기자와 함께 찾아가게 되었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선생님 생애의 일화들을 몇 시간 동안 들을 수 있었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시인의 자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시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녹음한 것을 정리하면서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을 대부로 모시게 됐던 것이다. 제자 이승하

시인·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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