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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아름다운 한때… 그 과거가 현재 속으로 들어와 행복을 만든다

  • 입력 2023-07-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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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중요한 순간 있어… 루소, 50년전 연인과의 만남 회상하며 “그 첫 순간이 내 일생을 결정”
지나간 기억이 현재의 의미 만들어 내… 현실성은 흘러가는 시간·서 있는 과거가 교차하는 지점서 태어나


■ 지식카페 - (40) 인생의 빛나는 한순간, 과거와 지금의 교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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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권에 있다. 북산과 산왕의 경기에서 빨간 머리 강백호는 부상 때문에 경기에 나가는 것이 위험한 지경이다. 그를 말리는 감독에게 강백호는 이렇게 말하며 경기에 나가고 또 이긴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그는 인생의 빛나는 한순간을 바로 ‘지금’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는 한순간. 영감님의 과거 영광의 순간을 제자 강백호는 바로 자신의 ‘지금’ 속에서 독창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만큼 하버마스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지금, 곧 현재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꼭 맞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진정한 현재는 전통의 계승과 혁신의 장소로 실증된다.”(이진우 역)

도대체 한 인간의 삶에서 빛나는 한순간이란 무엇인가?

누구에게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언제인지 사람들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중요한 줄도 모른 채 그 순간은 지나가 버린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푸코의 추’에서 이런 순간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은 어떤 결정적인 순간, 생사를 정당화하는 그 순간이 이미 지나간 줄 모른 채 평생을 ‘결정적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 수도 있다.”(이윤기 역)

말년의 루소는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50년 전의 중요한 한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루소는 열일곱 살 때 바랑 부인을 만난다. 그녀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루소의 애인이 된다.

“그 첫 순간이 내 일생을 결정짓고, 내가 피할 수 없도록 사슬로 묶어 내 남은 삶의 운명을 주조한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참으로 평온하고 달콤한 날들을 함께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날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날들은 너무나 짧게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고, 그 뒤로 어떤 운명이 이어졌던가! 내 생애 동안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내가 온전히 나였던, 진정으로 나의 삶을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저 유일하고 짧은 시절을 기쁨과 감동에 젖어 회상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문경자 역) 짧고 아름다운 한순간이 있고, 남은 삶은 그 한순간의 조명(照明)을 받고서만 모습을 나타낸다. 루소는 말한다. “…… 가장 뛰어난 여인에게 받은 도움을 언젠가는 갚는 데 나의 여가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저술가로서 루소가 탄생한다. 연인과의 완벽한 순간을 반추하고 그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저술가로서 루소의 이후 삶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추’에서도 위와 같은 과거의 중요한 한순간에 대한 성찰을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 푸코의 추의 마지막은 주인공의 평생을 지배한 어린 시절의 한순간을 묘사한다.

1945년 4월,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은 철수했고 파시스트들은 패주했으며, 전쟁은 이제 한 달 안에 끝날 것 같았다. 파시스트들에 맞섰던 민병대의 전사자 장례식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추모의 트럼펫을 연주하게 된다. 위대한 장례식을 위한 트럼펫 연주는 그의 삶의 최고의 순간이었다. 소설은 이 순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진실은 순식간이다(그 후에는 모든 게 그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그 순간은 그저 그 자체였다. 그것은 다른 무엇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모든 게 충족되었으며, 모든 걸 보상받았다.” 최고의 순간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다. 그 이후에 흘러가는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의 의미를 지키고 또 반복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후의 시간은 그 자체로 충족적인 저 최고의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지시해 보이는 ‘기호’일 것이다.

과거의 한순간은 ‘현재’를 빛나게 하고 현재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이런 순간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바로 마들렌 체험 말이다. 어느 겨울날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와 차 한 모금을 마신다. 그것은 그냥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평범한 간식이다. 그러나 과거 주인공이 머물던 지방 콩브레에서의 마들렌 체험에 대한 기억과 함께 지금 마들렌을 먹는 현재의 한순간은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것이 된다. 그것은 과거 전체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현재의 한순간이다. “……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김희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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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순간에 대한 존중이 바로 ‘현대’의 특성이기도 하다. 푸코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현대성에 대해 숙고했던 시인 보들레르를 다루면서 현대성은 현재를 ‘영웅화’하려는 의지라고 말한다. 현재에 대한 존중을 보들레르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당신에게는 현재를 경멸할 권리가 없다.” 현재 순간을 존중한다는 것 또는 현재를 영웅화한다는 것은 뭘까?

보들레르는 동시대의 화가들을 조롱했는데, 그들이 19세기의 복장이 추하다고 여긴 나머지 고대의 ‘토가’만을 그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의 유산만이 영원한 이상(理想)인 듯이. 이와 달리 보들레르는 당대에 입던 프록코트를 ‘우리 시대의 필연적인 복장’이라고 높이 추켜 올린다. 현재의 것 자체를 본질적인 것으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의상의 본질적인 원형으로서 고대의 옷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의상이 동시대의 본질을 표현한다.

모차르트의 삶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피터 셰퍼 원작)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모차르트의 최고 걸작들 가운데 하나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보마르셰 원작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은 전통적 계급 질서에 대한 조롱 때문에 당시 상연 금지된 작품이다. 왕의 신하들은 모차르트에게 왜 고대의 신화와 같은 영원한 것들을 다루지 않고 그런 저속한 작품을 오페라의 대본으로 선택했느냐고 나무란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어느 누가 자신의 이발사보다 헤라클레스에게 더 귀를 기울이겠냐며 과거의 영원한 가치들을 반박한다. 현재를 보지 않고 고대의 신화들에만 몰두해 있는 자들은 그저 대리석 똥을 싸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현재가 중요한 순간이다.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이 ‘새로운 코미디’라는 데 가치를 두는데, 여기서 방점은 ‘새로운’에 있다. 현대성이란 바로 새로운 순간인 ‘현재’에 대한 존중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순간은 그저 사라져 버린 것, 이제는 아무 의미도 기능도 없는 것일까? 현재의 순간은 과거와 완벽히 결별한 채 본질적인 것이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다시 보들레르에게로 돌아가 보자. 보들레르는 바로 현재적 삶을 통해서만 과거의 순간이 본질적인 것으로 회귀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런 회귀 속에서만 현재는 본질적인 것으로 존중받는다.

예를 들면, 베냐민이 보들레르에 관한 글에서 말하듯, 보들레르 시대의 삶의 방식을 특징짓는 도박꾼은 보들레르에겐 고대 검투사의 현신이다. “도박꾼의 이미지는 보들레르에게서 사실 고대 검투사 이미지의 현대적 보완물이다.”(김영옥·황현산 역) 또 19세기 유럽의 수도라 할 만한 파리에서의 삶의 방식을 대표하는 댄디는 고대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현신이다. “영웅은…… 댄디의 모습으로 출현한다.…… 댄디는 보들레르가 보기에 위대한 조상들의 후손이다.” 이렇게 현재라는 순간을 영위하는 것들은 과거의 것들이 변장한 모습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버마스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보들레르를 읽어나가며 말하듯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현실성은 오로지 (현재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영원의 교차점으로서만 구성된다.” 지금 생기롭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조각상처럼 서 있는 영원한 과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현재라는 순간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교차로서 지금 이 순간’은 인간이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베냐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말한다. “과거의 이미지는 획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최성만 역) 과거는 박제나 골동품처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와 단절한 채 완벽한 새로움 속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지도(指導)를 받음으로써만 우리는 현재의 사건들을 인지할 수 있다.

만일 과거의 빛나는 한순간이 지금의 순간에 개입해서 더할 나위 없이 의미 있고 소중한 현재를 만들어 낸다면, 우리는 베냐민의 말을 빌려, 현재의 모든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프루스트에게서 과거의 콩브레가 마들렌과 차 한잔을 마시는 현재의 순간 속으로 들어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만들듯이 말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주인공은 쇼샤 부인에게 감미로운 사랑을 느낀다. 어린 시절 주인공이 호감을 느꼈던 친구 회페의 이미지가 현재의 쇼사 부인의 외모 속으로 강림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이, 현재의 사랑 속으로 과거의 인물이 들어선다. 역사에서도 그렇다. 과거의 로마 공화정은 프랑스혁명의 현재 순간에 개입한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한 채 다가오기에 우리에게 현재는 늘 새롭고 유일무이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과거와 지금(현재)의 교차

시간이 ‘과거’와 ‘지금’의 교차에서 구성된다는 것, 또는 현재란 과거가 변신한 채 재림한 모습이라는 것은 현대 사상과 문학의 중요한 주제이다(예컨대, 프루스트의 문학). 수많은 작품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 주제를 탐구했다. 가령 본문에서 언급한, ‘지금-시간(Jetztzeit)’의 의미를 ‘과거 이미지’의 포착에서 찾은 베냐민의 역사철학적 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가 있다. 이와 꽤 결을 달리하지만, 역사적 이해라는 것은 과거를 골동품 다루듯 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고, 과거와 지금 맥락의 융합 속에서 달성된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등에서의 통찰 역시 중요한 사상적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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