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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의약·치료 관장… 최고 직책 ‘어의’ 대다수는 평민·중인 출신

  • 입력 2023-05-26 09:03
  • 수정 2023-05-2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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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이미지 크게보기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지식카페 - (18) 궁궐 전속병원 ‘내의원’

태종때 설치된 내약방이 모체… 의원중에서 출중한 실력을 갖춘 자들만 뽑아서 배치
‘동의보감’ 쓴 허준은 서자 출신으로 종1품 벼슬 받아… 어의는 왕이 죽으면 유배·교수형 당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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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의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내의원(內醫院)은 궁궐 안에 있는 병원이란 뜻으로 왕실을 전담하는 의료기관인데, 태종 때 설치된 내약방이 그 모체다. 이후 1443년에 세종이 내의원으로 개칭하고 관원 16인을 배치함으로써 비로소 독립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세조 때 관제 개혁이 이뤄지면서 정과 첨정 1명씩 배치되고 판관과 주부가 각 2인, 직장 3인, 봉사와 부봉사, 참봉 등이 각 2인씩 배치되었다. 이후로 인원수에 약간의 변화가 있긴 했으나 큰 변화는 없었다. 이들 관원 외에 산관(散官·벼슬의 품계만 받고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이 많았는데, 당상과 당하 12인, 침의 12인, 의약동참 12인, 어의 3인 등이 있었다. 내의원에 소속되는 산관과 의관은 정원이 없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많은 인원을 둘 수 있었다. 의관의 정원이 정해지지 않은 것은 왕실 사람들의 숫자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의원에는 이들 산관 외에도 서원 23인, 종약서원 2인, 대청직 2인, 본청사령 7인, 임시사령 5인, 의약청사령 1인, 침의청사령 2인, 급수사령 1인, 군사 2인, 물을 길어 나르는 수여공 2인, 동변군사 3인, 삼청군사 18인이 별도로 배치되었다. 또 이곳에 근무하는 의녀의 숫자는 18인이었다.

내의원은 특별히 왕의 약을 짓는 곳이기에 의원 중에서 실력이 출중한 자들을 가려 뽑았다. 이곳의 실제적인 일을 맡아보는 장관으로는 정3품 내의원 정(正) 1인이 있었는데, 그 위로는 겸직인 도제조, 제조, 부제조가 있었다.

도제조는 왕이나 국방, 외교 등과 관련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관에 두었던 정1품의 겸직이며, 삼정승 중 한 사람이 맡았다. 제조는 종2품 벼슬이 겸직하였고, 부제조는 승지가 겸임하였기 때문에 내의원도 상서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내의원은 평소엔 왕실의 의약을 관장하였으나 왕과 왕비의 병환이 위중할 때는 특별히 시약청과 의약청을 임시로 설치하여 담당자를 궁중에 상주하게 하여 치료와 투약에 신중을 기하였다.

조선에서 가장 영예로운 의사, 어의

어의(御醫)는 임금과 왕실 사람들을 치료하던 의원으로 의사로서는 최고로 영예로운 직책이었다. 어의를 태의라고 부르기도 했고, 태의 중에 가장 높은 태의를 수태의라고 불렀으며, 또 수태의를 줄여서 수의(首醫), 즉 ‘우두머리 의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의는 한마디로 나라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사로 인정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왕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론 왕의 명령으로 중요한 신하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예컨대 세종은 양녕대군이 학질을 앓고 있을 때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기도 했고, 자신의 친척이었던 원주 목사 조박이 아플 때도 어의 어승진과 김지수를 보내 치료하게 한 적도 있다.

왕이 신하에게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신하를 아낀다는 의미였다. 세종뿐 아니라 조선의 왕들은 아끼는 신하나 중요한 신하가 병을 앓으면 의당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렇듯 어의는 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조선의 의원들은 대개 양반 출신이 아니었다. 양반 출신의 의원을 유의(儒醫)라고 하는데, 양반들은 유의에게 치료받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유의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의원에 속한 대다수 의원은 평민 출신이나 중인 출신이었고, 때로는 천민 출신의 의관도 있었다. 그 때문에 의원들의 벼슬은 종3품이 한계였다.

하지만 왕의 병을 고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겐 1품 벼슬이 내려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 허준이었다. 허준은 서자 출신으로 의관이 된 인물인데, 임진왜란 때 선조를 보필한 공으로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받았다. 심지어 1606년에는 선조의 중병을 치료한 공을 인정받아 정1품 보국숭록대부 벼슬을 받을 뻔했다. 하지만 선조의 뜻과 달리 신하들의 맹렬한 반대로 정1품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어의의 삶은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선조의 총애를 받던 허준이었지만 막상 선조가 죽자, 그 책임을 지고 유배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런 일은 허준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 내의원 어의라면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침술로 유명했던 신가귀는 효종의 병을 고쳐 큰 영예를 누렸지만, 효종이 침을 맞고 피가 멈추지 않는 상태에서 죽는 바람에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렇듯 어의의 자리는 내의원의 꽃이기도 했지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자리기도 했다.

조선 편작 허준과 침술의 달인 허임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중시한 것은 자신의 건강이었다. 조선시대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으니, 노비로부터 평민과 양반, 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건강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뛰어난 의사는 신분에 상관없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문화권에서 의사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은 편작인데, 그는 상고시대인 주나라의 명의였다. 그의 원래 성씨는 진(秦) 씨였으며, 이름은 월인(越人)이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중국 대륙을 돌아다니며 의술을 베풀었는데, 그 의술이 워낙 뛰어나 신의로 불리게 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는 약왕(藥王)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의학 이론은 후예들에 의해 정리되었는데, 그 책이 ‘난경(難經)’이다. ‘난경’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동양 의서 중 가장 오래된 ‘황제내경’과 함께 한의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책으로 손꼽힌다.

편작 이후 시대마다 편작으로 불린 의사들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편작’이라 하면 단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을 꼽을 수 있다. 죽은 지 이미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명성이 남아있는 것은 ‘동의보감’ 덕분일 것이다. 그만큼 ‘동의보감’은 동양의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의보감’은 광해군시대인 1610년 8월에 완성되어 3년 뒤인 1613년에 출간된 책이다. 이후 동의보감은 한국과 중국, 일본, 타이완으로 퍼져 나가 엄청난 각광을 받았다. 중국에서도 서른 차례 이상 출간되었으며, 청나라에서는 의사들이 나라에 청원서를 넣어 국가 차원에서 인쇄했을 정도였고, 일본과 대만에서도 가장 각광받은 동양 의학서였다. 그 덕분에 허준은 조선의 편작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던 것이다.

허준 이후 의술로 명성을 얻은 대표적인 인물은 ‘침구경험방’의 저자 허임이다. 그는 악공이었던 허억복과 양반 집 여종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관노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뛰어난 의술 덕분에 관노에서 풀려나 의관이 되었고, 여러 차례 지방관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침구(鍼灸), 즉 침과 뜸의 달인이었다. 그의 침술에 대해선 동시대의 어의였던 허준도 인정했다.

다음은 선조 37년(1604년) 9월 23일에 허임이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한 기록인데, 당시 허준은 선조가 침을 맞아야 한다고 진단하고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미안한 일이지만, 침의(針醫)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허준은 스스로 침놓는 법을 모른다고 말하며 허임에게 침 맞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허임의 침 덕분에 선조의 편두통을 고칠 수 있었다.

이렇듯 허임은 침술에 있어서만큼은 동방의 편작이라는 허준을 훨씬 능가하는 의사였다. 따라서 그의 저서 ‘침구경험방’은 침구 시술에 있어서는 최고의 의서라고 할 만하다.

허준과 허임 외에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어의 출신 명의들을 열거하자면, 태조를 죽음의 문턱에 회생시킨 양홍달을 비롯하여 태종대에 의술로 이름을 날린 일본 출신 어의 평원해, 조선 초 최고의 의사로 세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노중례, 허준과 쌍벽을 이룬 명의 양예수, 인조대 번침의 명인 이형익, 한낱 마의에서 어의까지 오른 까막눈 의사 백광현, 고약 하나로 종기 치료의 대가가 된 정조대의 피재길 등등 많은 인물이 있었다.

작가

■ 용어설명 - 산관(散官)

벼슬의 품계만 받고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이다. 언젠가 실직(實職)에 임명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예비관리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문관과 무관은 누구나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武散階)를 받게 되어 있었으나 산관(散官)은 관계에 있어서의 위계일 뿐, 그 자체가 관직은 아니었다. 이 제도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있었으며, 청나라 때는 봉증관(封贈官)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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