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슬픔에 잠긴 유족 전세사기 피해 사망자 A 씨의 발인식이 엄수된 20일 오전 인천 중구 인하대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시신이 운구되고 있다. 유족 중 한 명이 지인의 부축을 받은 채 운구 행렬을 뒤따르고 있다. 윤성호 기자

피해자 눈물의 발인식

31세 앳된 얼굴의 영정 사진
유족 슬픔 못가누고 주저앉아
지인 “평소 힘든 내색도 안 해”
전재산 전세보증금 날리게되자
제2인생 시작못하고 세상 등져

인천 = 지건태 기자 jus216@munhwa.com

최연소 육상 국가대표 출신이란 화려한 수식과 달리 전세사기 피해자 A(여·31) 씨의 발인식은 너무도 짧고 초라했다.

20일 오전 인천의 한 장례식장 지하 1층에 마련된 그의 빈소에는 몇 안 되는 유족들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울분과 설움이 뒤섞인 듯한 흐느낌이었다. 단발머리에 흰 블라우스를 차려입은 그의 영정 사진 옆에는 선수 시절 목에 걸었던 영광의 메달 대신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화환이 놓였다. 언니의 영정 사진을 품에 안고 운구 행렬 맨 앞에 선 동생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안경 너머 붉게 충혈된 눈은 감출 수 없었다. 단 하나뿐인 언니를 잃은 슬픔보다 세상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그는 발인식 내내 입술을 굳게 깨문 듯 소리 내 울지 않았다.

큰딸의 영정 사진만 어루만지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아버지(54)는 딸의 관이 운구차에 실리자 슬픔에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만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타지에 혼자 사는 아버지와 단둘이 일본 여행을 갈 만큼 평소에 살뜰히 가족을 챙기던 딸이었다. 유족을 대신해 언론 취재에 응한 한 지인은 “정작 본인은 수도요금도 못 내는 어려운 상황인데 가족들한테 내색조차 않았다”며 “주말마다 아버지께 전화해 안부를 묻는 착한 딸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유족들이 많이 힘들어한다”며 언론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했다. 발인식은 유족과 그의 선수 시절 지인, 전세피해대책위 관계자 등 10여 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20여 분 만에 끝났다.

A 씨는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국내 최연소 육상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돼 여자 해머던지기 종목 5위를 한 유망주이기도 했다. 국내외 대회에서 선전하며 선수와 코치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2019년 9월 인천 미추홀구에 정착한 뒤 ‘건축왕 전세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됐다. A 씨가 살던 아파트는 지난해 전세사기 피해로 전체 60세대가량이 통째로 경매에 넘겨졌다. 그는 재계약을 하면서 임대인 요구로 보증금을 9000만 원으로 올려줘 최우선변제금조차 받지 못했다. 소액임차인은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라 전셋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일정 금액의 최우선변제금을 보장받지만 그는 소액임차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보증금을 잃고 당장 거리로 나앉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처지의 한 전세사기 피해자는 국화꽃 한 다발을 품에 안고 인천가족공원 화장장까지 운구차를 쫓아와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사기꾼들이 제대로 벌 받을 수 있게 끝까지 싸우겠다”는 말을 남겼다. A 씨는 지난 17일 오전 자택에서 손글씨 유서를 남기고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으나 결국 숨졌다. 그는 세 번째로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다. A 씨의 시신은 한 줌의 재로 유골함에 담겨 가족이 가까이 있는 경남 김해추모공원에 안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