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하면서 한·일 경제 관계에도 복원의 시간이 도래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 조치였던 수출 규제부터 풀기로 했다. 마침 일본 대표 기업인 소니의 요시다 겐이치로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6일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캠퍼스를 방문했다. 양사는 이미지 센서에서 치열한 경쟁 관계지만, 자율주행차에 필요한 고성능·대용량 메모리 반도체에서 협력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스러운 해빙 분위기다.

지난 4년간 양국 관계 파탄에서 가장 뼈아팠던 대목은 반도체 생태계 붕괴였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일본이 장비와 소재를 공급하고, 한국이 반도체를 생산해온 황금의 분업 구조가 무너져 내렸다. 반도체 생태계는 수백 개의 최첨단 공정으로 이뤄지는 만큼 단기간에 복구하기 힘들고, 한 나라가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도 없다. 일본 정부는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폴리이미드 등 반도체 핵심 물질부터 다시 대한(對韓) 수출 화이트 리스트에 포함하기로 했다고 한다. 반도체 생태계 복원으로 경제 관계 정상화에 시동을 건 셈이다. 제대로 된 수순으로 보인다.

크게 보면 한·일 경제 관계 정상화는 미·중 공급망 경쟁 속에 한·미·일이 스크럼을 짜는 구도다. 하지만 미국 역시 반도체 지원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자국 우선주의로 치닫고 있다. 한국 혼자서 미국 반도체 패권주의를 견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일본도 1986년 홀로 맞서다 미·일 반도체 협정을 강요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초강대국 미국과의 양자 협상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안보동맹·가치동맹을 외쳐도 소용이 없다.

남은 방법은 한·일이 미국의 공세에 함께 맞서는 다자간 협상이다. 일본은 반도체 부활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소니는 대만 TSMC와 구마모토에 합작 공장을 짓고 있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업 기밀까지 요구하는 미국 전횡에 맞서 한·일·대만 3국이 지경학적 장점을 살려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면서 공동 대응하는 게 효율적인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