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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자유주의 질서에 新제국 도전
소프트파워 외교 갈수록 중요
한류는 자유와 민주주의 상징

대중문화 강국 정상회담 필요
C4 국가 페스티벌 정례화하면
대중문화 엑스포로 진화 가능

현재 국제정치는 과거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중국·러시아와 그들의 국제질서 현상 변경을 막으려는 자유주의 선진국 간의 이른바 신냉전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신냉전은 기술·자원·공급망·핵무기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으로 비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 가치를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만들어 갈지를 둘러싼 ‘가치 냉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인권·민주·법치·복지와 같은 보편가치를 중심으로 발전돼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상대적 가치와 강대국 중심의 세력권으로 나누려는 제국주의 세력의 도전이 시작된 것이라 하겠다.

이 ‘가치 냉전’은 자유주의 국가들의 적극적인 ‘보편가치 외교’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가치 냉전의 한가운데 있는 대한민국은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성공이 만들어 낸 한류(韓流)라는 매우 귀중한 대중문화 소프트 파워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이제 이 소프트 파워를 활용한 적극적인 가치외교를 구사해 나가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 정부는 민간이 시장에서 만들어 낸 문화 상품인 한류를 그 이상으로 활용하는 정교한 가치외교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행사에 많은 사람을 모으는 용도와 우리나라 대중의 감성 조작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류와 한국의 역동성,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힘을 세계에 보여주는 우리의 가치외교 전략에 필요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공유해 보려 한다.

가치외교 또는 소프트 파워 외교를 하기 위한 국제 환경은 방송 매체와 SNS가 발달한 지금보다 더 나은 적이 없었다. 과거에는 자국의 가치·명예·문화·이념 등을 전파하기 위해 주로 타국의 엘리트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을 세웠다.

프랑스는 1871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패하면서 실추된 자국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언어 및 이념을 전파하는 ‘알리앙스 프랑세즈’라는 기관을 1883년에 세웠다. 독일도 1932년 유사한 기관인 ‘괴테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한편, 독일 나치 정부의 강력한 프로파간다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은 1934년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을 세웠는데, 이들 기관은 광범위한 대중으로 파고들기보다는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한다. 단파 라디오 방송이 나오면서 ‘미국의 소리 방송(VOA)’같이 대중을 향한 가치외교가 발달하기 시작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그 도달 범위는 한정적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모든 국가가 이른바 ‘디지털 극장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일상에서 종일 스크린만 보는 대중을 향해 민·관이 다양한 스펙터클을 창조하고,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게 됐다. 이 스크린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됐다. 그리고 그 스크린을 가장 깊고 넓게 파고든 것이 대중문화다. 대중문화는 자유롭고, 재미있고, 멋있으며, 동경(憧憬)의 대상을 만들어 낸다. 마치 1960년대 미국의 재즈 외교(Jazz Diplomacy)가 소련의 재즈 카페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청년들을 만들어 낸 것과 같이 지금의 대중문화도 자유로움과 다양성과 창의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외교의 대상은 재즈 카페와 같은 한정된 공간의 청년이 아니라,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디지털 극장의 관객이다.

한류라는 세계적인 대중문화 소프트 파워를 가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성공을 상징하는 대중문화를 세계에 획기적으로 전파하는 세계 극장을 세울 수 있다. 하나의 방법은 대중문화 강국끼리 매년 모여 정상회담을 넘어선 이른바 ‘정상 페스티벌’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 정상 페스티벌 기간에 보편가치가 자체 발광하는 대중문화, 첨단 기술을 세계에 발신하면 세계의 젊은이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이 가칭 ‘C4’(Cultural and Creative 4)라는 정상 페스티벌을 출범시켜 대중문화 강국인 미국·영국·일본과 주요 7개국(G7)에 버금가는 선진 외교 행사를 정례화하면 한국이 ‘가치 냉전’의 최전선에서 보편가치 확산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종의 세계 대중문화 엑스포로도 진화해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