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영화 ‘아마겟돈 타임’에서 폴(뱅크스 레페타)과 조니(제일린 웹)는 ‘절친’이다. 그러나 시대는 인종과 계층이 다른 둘의 우정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 영화 ‘아마겟돈 타임’

레이건 시대, 예술가 꿈꾼 ‘폴’
“돈 되는 일 해라” 핀잔만 들어
흑인과 어울리다 강제전학도

“부당함 맞서라” 할아버지 조언
사립 학교 벗어나 거리로 향해
사회부조리 대항하는 용기 비춰

‘아마겟돈 타임’(감독 제임스 그레이·23일 개봉)은 198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가족과 학교가 세상 전부인 소년 폴(뱅크스 레페타)이 세상 너머로 나아가는 성장통에 관한 영화다. 뉴욕 퀸스 출신, 유대계 혈통,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일가가 다닌 명문 사립학교 등 감독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반영돼 있지만, 누구나 성장통을 겪기에 감독의 이야기는 곧 관객의 이야기가 된다. 한편으론 감독의 미시적 경험들은 1980년대 미국이란 세계를 비추는 거울로 확대된다. 결국 영화는 나의 이야기이자 시대의 이야기로 남는다.

영화의 두 축은 폴과 외할아버지 애런(앤서니 홉킨스)의 우정 그리고 폴과 흑인 친구 조니(제일린 웹)의 우정이다. 예술가를 꿈꾸는 폴은 조니와 잘 통하지만, 어른들은 조니가 유급한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리를 두라 하고, 끝내 폴을 사립학교로 보낸다.

애런은 학교에서 ‘뒤처진다’는 소리를 듣는 폴의 예술가적 열망을 지지하는 유일한 어른이다. 그는 “세상과 맞서 싸우라”는 조언을 건네며 폴의 정신적 성장을 뒷받침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과거를 떠나보내듯 폴 역시 이들과 작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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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타임’은 ‘부딪힘’과 ‘나아감’에 관한 영화다. 폴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인 집과 학교에서 늘 부딪힌다. 엄마(앤 해서웨이)는 그를 조니와 떼어놓으려 한다.

그는 예술가가 되고 싶지만, 아버지(제러미 스트롱)로부터 “돈 벌 생각이 없구나”란 핀잔만 듣는다. 부딪힘의 과정에서 폴은 매번 엇나간다. 조니와 땡땡이를 치거나 대마초를 피우고, 급기야 가출해 학교 컴퓨터를 훔치려다 들킨다. 폴이 조니만을 두고 경찰서를 나서는 순간은 자신이 벌인 일을 책임질 수 없는 나약한 처지란 사실을 최초로 자각하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은 역사의 작은 한순간과도 같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에서 가정과 학교는 1980년대 미국의 축소판이다. “미국이 도덕적인 ‘아마겟돈’에 직면해 있다”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념에 따라 흑인처럼 미국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은 영화에서 가차 없이 소외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누나이기도 한 검사 매리언 트럼프(제시카 채스테인)는 폴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우리 학교’ 학생인 여러분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연설한다.

폴은 이러한 시대와 부딪히지만, 나아가며 성장한다. 폴이 사립학교 친구들이 흑인을 ‘검둥이’로 부르는 것에 대해 토로하자 애런은 “부당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할아버지의 조언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작용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존 딜)가 “CEO와 대통령이 될 의무가 있는 너희들 앞엔 멋진 인생이 펼쳐져 있다”고 연설할 때, 폴은 결심한 듯 학교를 벗어나 거리로 나선다. 사립학교로 상징되는 위대한 아메리카 ‘바깥’에 속하겠다는 무언의 외침. 영화는 더 큰 부딪힘을 향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폴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비춘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폴의 뒤에서 따스한 눈빛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애런 역의 앤서니 홉킨스는 든든한 기둥으로 영화를 지탱한다. 앤 해서웨이의 당당하면서도 굳센 모성 연기도 좋다. 현실감 있는 그 시대 아버지 모습을 재현해낸 제러미 스트롱은 내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폴과 조니 두 소년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매번 절체절명의 순간들인 유년 시절의 감성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