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2. 해영연로도

■ 박정혜의 옛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 - <8> 세전서화첩

과거급제 축하·노인들에게 베푼 양로연·中 사신 접대 등 31폭에 실제 있었던 일 그림과 글로 설명
23세손 김중휴, 400년 걸친 선조문집·연보 등서 기록 꼼꼼히 찾아내… 지방화가 3명이 꾸밈없이 묘사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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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지역을 대표하는 가문 중의 하나인 풍산 김씨 집안에는 보물로 전승된 특별한 가전화첩(家傳畵帖)이 전한다. 두 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표지의 제목대로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이라 부른다. 16세기 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약 250년간에 해당하는 집안의 중요한 인물 19명의 행적을 31폭의 그림과 글로 자세하게 설명하여 그림으로 보는 가문의 역사책이라 할 만하다. 그림이 먼저 배치되고, 이어서 해당 그림의 내용을 보완하는 다양한 형식의 글이 각종 문헌에서 폭넓게 발췌되어 실려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1. 대지도박도

세전서화첩의 그림을 종류별로 분류해 보면 연회를 주제로 한 그림이 14건으로 가장 많다. 과거급제자를 축하하는 문희연(聞喜宴), 노인들을 위로하는 양로연, 지방관 부임을 기념한 부임연, 같은 해에 과거 급제한 동기생끼리 벌이는 동방연(同榜宴),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모이는 동도회(同道會), 뱃놀이하며 경치를 즐기는 선유(船遊), 그 외에도 지방 사족들의 다양한 친목회를 내용으로 하는 그림들이다. 그다음으로 많은 것이 주인공들이 은거하던 유거지(幽居地)나 낙향하여 경영하던 정사(精舍)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또 중국 사신에 대한 접대, 중국으로 떠나는 사행단의 환송, 의병 활동 등은 현전하는 사례가 드문 그림 주제로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그밖에는 선정(善政)·효행·절의·청백 등 주인공의 본받을 만한 인품을 시각화한 그림들이 있다. 세전서화첩의 그림은 기본적으로는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을 묘사한 기록화이면서도, 주제에 따라 풍속화, 고사인물화, 실경산수화 등의 성격도 겸하고 있어서 장르와 주제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점이 특징이다. 이 중에서 몇 가지 장면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세전서화첩은 10세손 진산공(珍山公) 김휘손(金徽孫, 1438~1509)이 1507년경 대지산(大枝山 : 지금의 경북 예천군 광석산(廣石山))에 선영을 마련하게 된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우연히 만난 박 씨와 내기 장기를 두어 이긴 대가로 그로부터 선영으로 삼을 땅을 얻게 되었다는 내력이 첫 번째 그림 ‘대지도박도(大枝賭博圖)’에 묘사되었다(그림 1). 대지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성주봉(聖住峯),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머물다 떠날 때 가사를 걸어 두었다는 소나무 두 그루, 두 대사를 사모하는 뜻에서 그 자리에 창건한 선유암(仙遊庵)과 유의암(留衣庵) 등이 풍수 개념을 따른 산도(山圖)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김휘손이 길지에 선영을 마련함으로써 앞으로 풍산 김씨 가문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는 예고를 첫 번째 장면에서 하는 듯하다.

이미지 크게보기 3. 천조장사전별도

11세손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 1467~1535)은 역대 풍산 김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0여 년간 지방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오로지 백성들 편에서 선정을 베푼 공로를 인정받아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풍산 김씨로는 처음 불천위로 추대된 인물이다. 경주부윤을 마치고 돌아갈 때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러 나온 고을 사람들의 행렬이 수십 리에 이르렀으며, 이들 중의 30여 명은 하인으로 삼아줄 것을 간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해영연로도’는 김양진의 황해도 관찰사 시절 흉년이 닥치자 백성을 골고루 구제하고 고을 노인들에게 베푼 양로연 모습을 그린 것이다(그림 2). 감영 대청의 김양진과 고을 수령들, 춤추는 기녀, 술과 음식이 가득한 상을 나르는 하인들이 표현되었다. 참석한 노인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추는 모습은 이날의 양로연을 대하는 노인들의 진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풍산 김씨 가문의 비약적인 발전은 17세기 전반에 김양진의 증손자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의 여덟 아들, 이른바 ‘팔련오계(八蓮五桂)’에 의해 성취되었다. 이들 여덟 명은 모두 소과에 입격하였고 다섯 명은 대과에도 급제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대현은 소과를 통과했지만 관직보다는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사후에 지역 유림에 의해 존숭받아 불천위로 추대되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형개(邢개, 1540~1612)의 접대 낭청으로 일했으며 향병(鄕兵)을 모아 대대적인 구휼 활동도 벌였다. 형개는 귀국에 앞서 김대현에게 자신을 돌봐 준 감사의 표시로 전별도를 그려 선사했다고 한다.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는 1599년 선조가 서대문 밖 홍제원(弘濟院)까지 행차하여 귀국길에 오른 명나라 장수 일행을 전별하는 광경을 긴 행렬도로 그린 것이다(그림 3). 형개가 앉아 있는 군문(軍門) 앞으로 귀국길에 오른 명나라 군대 행렬이 지나고 있는데 이 중에 눈에 띄는 것은 특수부대 모습이다. 화면 왼편 아래에 보이는 수레를 탄 흑인 4명은 해귀(海鬼)로 불렸던 포르투갈 출신 수군(水軍)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얼굴빛은 까맣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붉으며 몸집이 아주 커서 말을 타지 못해 수레를 타고 다녔다고 하는데 조선사람 눈에 비친 그들의 낯선 외모가 그대로 묘사되었다. 또 해귀 아래쪽에는 ‘원병삼백(猿兵三百)’이라는 깃발을 중심으로 평택의 소사전투(素沙戰鬪)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원숭이부대도 보인다.

이미지 크게보기 4. 치자래도

세전서화첩에는 특정한 사건이나 행사를 그린 것 외에 주인공의 인품을 칭송하는 그림도 있다(그림 4). ‘치자래도(雉自來圖)’는 19세손 희구재(喜懼齋) 김서운(金瑞雲, 1675~1743)의 효성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과거도 포기한 채 노부모 봉양에 힘을 쏟았다. 꿩마저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반찬거리가 떨어질 때면 들에 있던 꿩들이 스스로 집안에 날아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경상도 안렴사로 나간 박문수(朴文秀, 1691~1756)가 이 소문을 듣고 김서운의 집에 일부러 하루 묵으며 몸소 그 사실을 확인한 뒤 지은 ‘치자래설’이 전한다.

세전서화첩의 그림은 1859년경 적어도 세 명의 화가가 한꺼번에 그린 것이다. 능숙하고 세련된 회화 수준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이름 없는 지방 화가의 꾸밈없는 묘사를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예컨대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자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춤판을 벌이고, 노인들은 술에 취해 갓이 벗겨진 줄도 모른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기도 하다. 근육질 몸매가 그대로 표현된 뱃사공, 화면 아래에 위치한 수평선과 거기에 뒤집힌 채로 떠 있는 배, 밀집한 인물의 어색한 겹침, 하늘·땅·물의 모호한 경계 등 화면 곳곳에서 어눌하지만 거침없는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전문적인 그림 수업을 받지는 못했지만, 자신만의 표현 세계를 가진 지방 화가의 화풍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며 신선하게 다가온다.

세전서화첩을 살펴볼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람은 이 서화첩의 기획자이자 편찬자인 23세손 학암(鶴巖) 김중휴(金重休, 1797~1863)이다. 세전서화첩의 존재는 전적으로 김중휴 덕분이기 때문이다. 김중휴는 41세에 소과를 통과하였지만 대과에 나가지 않았다. 세전서화첩을 완성하고 1859년 8월부터 10월까지 부묘도감(부廟都監)과 존숭도감(尊崇都監)의 감조관(監造官)으로 한양에서 수개월 일한 것이 관직 생활의 전부였다. 대신 김중휴는 경서와 사기를 연구하거나 집안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데에 몰두하였다. 그는 서화첩 제작에 앞서 집안에 간직된 상자들을 뒤져서 400여 년에 걸친 선조의 문집·행장·연보 등 기록을 꼼꼼히 찾아냈고, 빠진 것이 있으면 문중의 다른 집안이나 친지로부터 널리 구해서 베껴두었으며, 그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것은 자취를 추적하여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전서화첩 같은 가전화첩의 탄생 뒤에는 어느 한 뜻있는 후손의 끈기 있는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전서화첩은 조상을 선양하고 가문의 위상을 유지해 나가며, 후손들에게는 선조의 자취를 통해 가문의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자료로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서화첩이 풍산 김씨 한 집안에서만 그 효용성을 발휘하는 것에 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풍산 김씨는 경상도 지방에서 영향력 있는 재지 사족으로서 향촌 사회를 이끌어갔다. 벼슬이 높은 재상이었거나, 고을 수령으로서 청렴하고 어진 정치를 했거나,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거나, 도덕적으로 귀감이 되는 인물의 자취가 담긴 세전서화첩은 풍산 김씨가 속한 향촌 사회를 유교적으로 교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세전서화첩은 족보나 문집과 달리 어느 집안이나 흔히 전해오는 종류의 유물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매우 희소한 가치가 있는 문중의 유산이기도 하다.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풍산 김씨(豊山金氏)

풍산 김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판부사(判府事)를 지낸 김문적(金文迪, 1205~?)이다. 그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서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으므로 관적을 ‘풍산’으로 삼았다. 풍산 김씨는 경북 안동부 풍산현 오미동에 500년 이상을 세거해왔는데, 청백리로 유명한 허백당 김양진을 입향조로 삼고 있다.

■ 팔련오계

15세손에 해당하는 김봉조(金奉祖, 1572∼1630), 김영조(金榮祖, 1577∼1648), 김창조(金昌祖, 1581∼1637), 김경조(金慶祖, 1583∼1645), 김연조(金延祖, 1585∼1613), 김응조(金應祖, 1587∼1667), 김염조(金念祖, 1589∼1652), 김숭조(金崇祖, 1598∼1632) 등 여덟 명을 말한다. 막내아들 김숭조가 증광문과에 급제한 1629년에 인조는 형제의 과거 합격 이력을 듣고 이를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고 칭송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풍산 김씨의 세거지인 안동 ‘오미동(五美洞)’도 이때 인조가 하사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