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6일 현충일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을 방문해 입원 치료 중인 국가유공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 선진보훈이 국가경쟁력 토대다 - (3) 일류국가의 필수 요소

춘추전국시대 통일한 진나라
‘20등급 봉작제’로 기틀 마련

강력한 왕정 루이 14세 이후
상이군인 안식처·급여 등 제공

“보훈강화-국가융성 시기 일치
나라위한 헌신 존중할때 부강”


국가보훈처의 보훈부 격상 정부조직개편안 발표로 ‘보훈’이 국가에서의 역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한 국가가 융성했던 시기는 보훈이 강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보훈이 잘된 나라는 강한 국가인 동시에 일류 국가였으며, 보훈은 부국강병을 뒷받침하는 수단이었다. 춘추전국시대 변방의 후진국이던 진나라는 출신 성분이 아닌 군공의 높고 낮음에 의해 보상하는 20등급 봉작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천하 통일의 기초를 마련했다. 후한말 삼국시대 조조의 보훈정책 역시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의 유족에게 땅과 소 등을 지급하고 학교를 세워 그 자녀를 교육시키도록 했으며 살아남은 병사를 위해 종묘를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또 일반 병사를 대상으로 의식주뿐 아니라 생업과 자녀에 대한 배려까지 포함했다. 14일 조성현 보훈처 정책총괄팀장은 “진나라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기존 신분제도가 아닌 군공에 따른 신분제도를 도입하면서 단기간에 최대 강국으로 부상했다”며 “조조의 보훈정책은 오늘날의 선진 보훈 개념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뒷받침한 것도 보훈제도였다. 프랑스는 1670년 불구가 되거나 늙고 기력이 없는 모든 병사가 생계 걱정 없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라는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세계 최초의 보훈병원이자 안식원인 돔 교회 ‘오텔 데 앵발리드’를 1674년 건설했다. 일시적 보호를 위한 빈민 구제시설이 아니라,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인간의 존엄성 유지가 가능하도록 질 좋은 숙소와 음식, 의료 등이 제공되고 쇼핑과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었다. 1779년부터는 상이군인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1831년 이를 법제화했다. 지중해에서 가장 먼저 패권을 잡은 그리스 아테네는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군인의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를 주고 경관 좋은 곳에 국립묘지를 설치하는 등 일찌감치 선진 보훈제도를 펼쳐 부국강병의 터를 닦았다.

우리나라 경우도 국가가 융성한 시기는 보훈이 강한 시기와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삼국시대 보훈은 전공을 세운 자에 대한 포상이 ‘상사서’에 의해 시행됐고 통일국가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김종선 전 보훈처 차장은 설명한다. 고려의 보훈제도는 퇴역군인에 대한 지원제도 성격이 강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시대는 ‘충훈부’에서 보훈 업무를 보게 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후 전쟁에 공이 있는 관료들을 선무공신으로 선정해 그 화상을 그려 후세에 전하도록 하고 본인과 가족에 대해 관작과 품계를 올려주고 경제적 은전을 내리는 등 공적의 정도에 따라 포상했다. 하지만 조선이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략 때 어려움을 겪은 것은 보훈제도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다. 일부 보훈학자들은 “보훈제도는 고려말부터 일반 병사보다는 공신을 위한 특권제도로 변질됐고 조선시대에는 내부 통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성격이 강해진 측면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군사제도가 상비군 중심이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병농일치, 즉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필요시 병사로 소집되는 민병제로 변화하면서 전쟁에서 싸우는 것은 군역의 의무가 됐고, 이수광의 지봉유설 등에 드러나듯 전란에서 싸운 병사들에게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실제 양반의 상당수가 군역에서 면제된 사실만 봐도 국가를 위한 희생의 가치가 과거 신라, 고려나 유럽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면서 조선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는 평가다.

최정식 국가보훈처 소통총괄팀장은 “주요 국가를 보면 보훈의 강화와 국가의 융성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며 “국가를 위한 봉사와 헌신에 상응하는 존경과 보답이 항상 주어진다는 확신이 공동체에 존재할 때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대한민국 보훈제도 역사

아웅산 폭탄테러 겪고
원호 → 보훈 ‘질적 전환’
참전군인 유족 등 지원

우리나라 보훈시스템이 지원 개념의 ‘원호’에서 현대적 의미의 ‘보훈’으로 질적 전환을 이루는 계기는 1983년 발생한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이다. 보훈제도의 시초는 1950년 4월 전상군경과 그 유족에 대한 지원을 위해 제정된 ‘군사원호법’이었다. 6·25전쟁으로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자 1952년 9월 전몰군경 유족과 상이군경 연급법을 제정해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부터 6·25 전사자 및 유족에게 연금이 지급됐다.

하지만 저소득층에 한정된 지원으로 인해 배제된 전상군경과 유가족들의 국가에 대한 원망과 불신이 심화하면서 전상군경들이 대규모 시위를 하는 등 각종 사회문제가 불거졌다. 이에 따라 1961년 보건사회부, 국방부 등에 분산된 원호 업무를 통합해 ‘군사원호청’이 창설된다. 1962년 군사원호청이 원호처(장관급)로 승격되면서 독립유공자와 유족, 4·19 부상자와 유족이 원호 대상에 처음 포함된다. 전담 부처 창설로 실질적 원호를 위한 제도적 틀이 구축됐으나 ‘원호’가 ‘구호’와 비슷한 어감을 주는 탓에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이 구호 대상자로 비하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유가족들의 불만을 분출시킨 계기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사건’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당시 대통령을 수행하다 희생된 공무원을 ‘원호 대상자’로 처우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유족들은 청와대에 직간접적으로 불만을 전달했다”며 “이에 그분들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1984년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아웅산 희생자들은 국가사회발전특별공로 순직자 또는 공로자로 인정받게 됐다. 기관 명칭도 원호처에서 국가보훈처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정충신 선임기자 csju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