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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예안진용기자의 그여자 그남자

이젠 싸늘히 식어버린 부부… 죽음 앞에서 사랑을 확인하다

안진용 기자
안진용 기자
  • 입력 2022-10-11 08:56
  • 수정 2022-12-2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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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폐암 말기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와 “첫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남편의 유쾌하지만 코끝 찡한 로드 무비다.



■ 안진용기자의 그여자 그남자 -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세연과 진봉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온 아내
가족들 무관심에 외로운 신세
공무원으로 집안 건사한 남편
‘가부장’소리에 기댈 곳 없어

어느날 아내 시한부 선고받아
첫사랑 보고싶다며 함께 여행
어긋난 진실 알며 추억 무너져

관객 눈물 강요하는 신파 아닌
차분히 죽음 준비하는 ‘웰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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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열심히 살아왔다. 아들은 고3이다. 엄마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는 아들에게 도시락과 영양제를 챙겨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딸은 중2병에 단단히 걸렸다. 집에 오면 방문부터 걸어 잠근다. 남편은 도움이 안 된다. 애 둘 건사하느라 정신없는데, 퇴근하면 “집안 꼴” 운운하며 타박이다.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않는 남편은, 그야말로 남의 편이다. 어느덧 50대를 바라보는 평범한 그 여자, 세연(염정아 분)이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온갖 민원에 시달린다. 사춘기에 접어든 두 아이는 도무지 아빠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고3 수험생이 있는 집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아내의 무신경이 불만이다. 가장으로서 역할을 꽤 충실히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는 ‘가부장’ 운운하며 눈을 흘긴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은 도무지 기댈 곳이 없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에 접어들었으나, 하늘은 고사하고 가족들의 속내도 읽을 수 없는 그 남자, 진봉(류승룡 분)이다.

접점 없는 두 남녀, 한때는 뜨겁게 사랑했다. 그래서 결혼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산다. 그러다 아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길어야 두 달이란다. 그 여자, 그 남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아이러니한 제목을 가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다.

◇그 여자, 그 남자의 ‘만남’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세연의 삶에는 낭만이 가득했다. ‘밤의 교육부 장관’이라 불리던 DJ 이문세가 진행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에 사연을 보내고, ‘예언자’로 유명한 칼릴 지브란의 시집을 품에 꼭 안고 다닌다.

방송반 선배 오빠를 좋아했다. 그 오빠도 세연을 좋아하는 눈치다.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에 당첨돼 목포에 사는 둘이 서울행 버스도 같이 탔다.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걷던 추억은 여전히 달콤하다. 이 대목에서 영화에는 임병수의 ‘아이스크림 사랑’이 흐른다. “사랑스러운 나만의 그대여/ 언제까지 곁에 두고파” 하지만 이 가사처럼 흐르는 첫사랑은 좀처럼 없다. 첫사랑은 빛바랜 졸업장과 함께 잊혔다.

대학에 진학한 세연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청초한 대학생이다. 그러다 시위 현장에 휘말린다. 당황한 세연을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한 남성이 낚아챈다. 세연을 구하고 얼굴을 드러낸 그 남자 대학생의 얼굴 뒤로 후광이 비친다. 그렇게 그 남자, 진봉과 사랑에 빠진다.

주머니가 가벼운 두 사람은 조조 영화를 본다. 이때 흐르는 이문세의 ‘조조 할인’의 “돈 오백 원이 어디냐고 난 고집을 피웠지만/ 사실은 좀 더 일찍 그대를 보고파”라는 가사는 절약을 핑계로 사랑을 좇던 젊은 남녀의 심리를 반영한다.

세연은 진봉을 위해 ‘군바라지’도 했다. 해를 두 번 넘겨 30개월 복무하던 시절이다. 행정고시에 7차례 실패 후 뒤늦게 입대한 진봉은 “기다리지 말라” 외쳤지만, 세연은 “너하고 잔 게 백번이 넘는다”라고 역정을 내며 진봉을 기다렸다. 그렇게 둘은 부부가 됐다. 1980∼1990년대 사랑한 연인들의 흔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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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그 남자의 ‘이별’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나이 먹어가면서 사람이 변한 것일까? 아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신 상황이 변한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20년 가까이 살을 맞댄 세연과 진봉에게 서로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됐다. ‘공기’(空氣). 글자 그대로,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기운이다. 그래서 통 그 고마움을 모른다. 하지만 공기가 사라지는 순간 숨이 멎듯, 세연의 폐암 말기 소식을 듣는 순간 진봉 역시 숨이 멎는 듯하다.

습관은 참 무섭다. 평소 살갑지 않던 진봉은 그런 세연을 달래기보다는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버럭 화를 낸다. 세연은 서운함에 “괜찮은지, 무섭지 않은지 왜 물어보지 않냐고?”라고 울먹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진봉은 “내가 안 괜찮아서, 무서워서,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 봐 무서워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고 자조 섞인 답변을 내놓는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신파와는 적절한 거리를 둔다. 죽음을 거부하는 주인공의 절규로 관객의 눈물을 강요하기보다는 차분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주변을 정리해가는 ‘웰다잉’(well-dying)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게 담담하게 삶에 순응하는 아내를 위해 진봉은 파티를 연다. 한평생 세연과 크고 작은 관계를 맺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상을 떠난 후에 치러지는 장례식에는 ‘만남’이 없다. 떠난 이의 빈자리와 그 빈자리를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조문객만이 있을 뿐, 정작 장례식의 주인공은 없는 공허한 잔치다. 하지만 진봉이 마련한 파티에는 주인공 세연이 있다. 내 인생의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렇게 진봉은 남의 편이 아닌 남편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세연은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함께 노래 부른다.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찬란하게 반짝이던 눈동자여/ 떠난다면 보내드리리/ 뜨겁게 뜨겁게 안녕”(토이의 ‘뜨겁게 안녕’)

◇왜, ‘첫사랑 찾기’였을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세연의 마지막 소원은 첫사랑을 만나는 것이다. 방송반의 그 선배 오빠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는 진봉은 마뜩잖다. 하지만 못 이기는 척 아내의 첫 번째 사랑을 찾아 나서는, 부부의 마지막 여행을 시작한다.

인생의 각 챕터를 마무리하며, 인간은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하물며 인생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장에 들어선 세연에게 첫사랑은 미처 채우지 못한 소설의 비어있는 한 페이지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므두셀라 증후군 때문이다.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 기제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답다는 아이러니한 감정이다. 그래서 그 실체와 내 기억에는 꽤 괴리가 생기곤 한다. 이는 세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연은 자신이 간직하던 첫사랑의 기억과는 어긋난 진실과 맞닥뜨린다. 세연은 실망했을까? 그 반대다. 상상력으로 구축된 첫사랑의 추억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며, 평생 반려자로 살아온 진봉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진봉은 속 시원하게 웃는다.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세연의 인생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봉과 함께 ‘세연’이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의 마지막 장을 매듭지은 세연은 환하게 웃는 영정사진 속 모습으로 영원히 남았다.

이제는 진봉의 몫이 늘었다. 아들의 약과 딸의 스타킹을 챙겨주고, 화장실의 휴지도 손수 간다. 그러다 사진 속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친 그 남자는 묻는다. “나 이 정도면 잘하고 있지?”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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