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헌·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 ⑭ 토사구팽의 정치학
제우스 승리도운 프로메테우스
뛰어난 능력 덕, 되레 결박당해
“권좌에서 쫓겨날 것” 예언한 뒤
제우스의 초조함 이용해 풀려나
제우스는 자기 아버지 크로노스와 삼촌이었던 티탄신족들과 10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권력을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조력자는 단연 프로메테우스였다. 이름이 그의 각별한 능력을 보여준다. ‘프로’는 ‘앞’이라는 뜻이고, ‘메테우스’는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니, 그는 ‘앞을 내다보는 자’라는 이름이었다. 제우스와 크로노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승리를 예견하고 그의 편에 섰고, 일등공신이 됐다.
이미지 크게보기 아이스퀼로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잡을 함정을 팠다. 그가 아끼고 애지중지하는 인간들을 억압하자,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특권인 불을 훔쳐 불쌍한 인간들에게 줬다. 이때다 싶은 제우스는 신들에게 이 사실을 폭로하고 프로메테우스를 절도범으로 몰아붙였다. 곧바로 힘센 세 명의 신을 체포조로 보냈다. 힘과 완력의 신이 그를 붙잡아 카우카소스 산의 외지고 가파른 절벽에 밀어붙였고,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절대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로 그를 묶었다. 이 장면을 그리스의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생생하게 그려냈다.
힘의 신 크라토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신들이 그대의 이름을 프로메테우스라고 하다니, 그건 잘못된 일이지.” ‘앞을 내다보는 자’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이렇게 될 줄은 왜 몰랐냐는 조롱이었다. 제우스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건만, 이렇게 ‘팽’하고 버려지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절벽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절규한다. “그렇게 내 덕을 많이 보았건만, 배은망덕하게도 신들의 폭군 제우스가 나를 이렇게 대접하다니! 친구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폭정이 앓는 질병이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제우스에게 팽당하고 외딴 절벽에 매달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온 이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말했다. “그는 후회하게 될 결혼을 할 것이며, 그의 아내는 아버지보다 더 강한 아들을 낳을 것이오. 제우스는 그 아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날 것이오.” 프로메테우스의 예언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말한 것이지만, 동시에 올림포스 궁전에 앉아있는 제우스를 겨냥한 것이었다. 프로메테우스를 예의주시하던 제우스가 이 말을 놓칠 리 없었고, 프로메테우스는 묶여 있으면서도 이런 정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다른 이의 말이었다면, 가슴에 담아두지 않았겠지만, 직접 그 위력을 경험했던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예언을 그냥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급파해 그 결혼이 어떤 것이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프로메테우스는 말하지 않고 버텼고, 온갖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우스는 초조해졌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절벽에 묶여 있는 프로메테우스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던 제우스와 맞설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예언은 예정된 제우스의 운명을 내다본 결과가 아니라, 제우스의 불안을 읽어낸 프로메테우스가 지어낸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묶여 있던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굴복하고,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결박에서 풀려났다. 팽당한 자의 통쾌한 복수였다. 프로메테우스는 비밀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제우스가 폭력이 아닌 원칙과 정의로 통치해야 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결박에서 풀려나면서, 자신의 신념과 원칙으로 제우스를 결박한 셈이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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