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찰스 디킨스는 ‘황폐한 집’에서 “안개는 모든 곳에”라며 런던의 주체는 안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안개의 도시, 정확하게는 스모그의 도시였던 런던, 웨스트민스터 다리의 아침 풍경. 게티이미지뱅크

■ 장은수의 지식카페 - ⑨ ‘안개의 도시’ 런던

셰익스피어 작품속 ‘샤일록’은 템스강 건너에 우글…시티오브런던 중심으로 부르주아 계층, ‘쥐의 굴’ 같은 빈민가엔 노동계층
향락의 드라큘라와 프롤레타리아의 프랑켄슈타인은 자본주의 산물…고통에 지친 사람들 폐허를 열망하고 디스토피아 꿈꿔

이미지 크게보기

“안개는 모든 곳에. 안개는 녹색 섬과 목초지 사이를 흐르면서 강 상류에, 안개는 늘어선 배들과 거대한 (그리고 더러운) 도시의 강변 오염 지대 사이를 휘돌면서 더럽혀져 강 하류에. … 안개는 스며들면서 석탄 운반선 조리실에. 안개는 깔리면서 커다란 범선의 갑판 위에. … 안개는 화롯가에서 헐떡대는 낡은 그리니치 병원 연금수급자의 눈과 목구멍에. 안개는 문 닫힌 선실 바닥에 깔리면서 격노한 선장의 파이프 담뱃대에. 안개는 갑판에서 떠는 어린 수습 선원의 발과 손을 잔혹하게 에면서.”

‘황폐한 집’에서 찰스 디킨스는 런던의 진짜 주체가 안개임을 드러내면서 소설을 시작한다. 자연에서 범선으로, 범선에서 인간으로 이동하는 안개의 서사는 독자들 시선을 자연스레 추위에 떠는 어린 선원의 얼어붙은 손발에서 멈추도록 만든다.

안개 속에서 녹색 섬이 상징하는 청정 자연은 오염된 공장 지대로 바뀌고, 석탄 운반선이 표상하는 산업혁명은 매연이 돼 노병의 폐를 괴롭히며, 영국에 패권을 갖다 준 거대 범선은 추위에 떠는 소년을 남긴다. 친숙한 풍경에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들추고, 뿌연 스모그의 시간에서 가장 무거운 희망을 생산하는 디킨스다운 솜씨다.

디킨스는 런던의 작가다. 그는 제국의 수도 런던을 통해 세상을 그려냈다. 17세기 이래 런던은 자기 안에 세계를 품은 도시였다. 범선들은 이 세상 가장 먼 곳까지 이르는 수로를 통해 정보와 부를 모아들였다. 템스강은 제국주의 시대의 구글이고, 런던은 산업혁명 시대의 포털 사이트며, 커피하우스는 근대의 소셜미디어였다. 새뮤얼 존슨은 말했다. “런던에는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디킨스는 여기에 풍부한 상상력과 인간에 대한 연민만 보태면 됐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항구 요새 론디니움을 건설했다. 5세기쯤 앵글로색슨족이 바다를 건너와 버려진 요새를 점거하고 이름을 런던으로 고쳤다. 런던의 역사는 템스강 하구의 작은 식민 도시에서 시작됐다.

106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쳐들어와 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윌리엄 1세가 됐다. 정복왕 윌리엄은 봉건제를 도입해 통치 체제를 국왕 중심으로 바꾸고 왕실 역사를 열었다. 그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런던에서 금융업을 시작하고, 12세기 중엽 이탈리아 상인들이 은행을 개설해 그들과 경쟁했다. 돈의 패권을 놓고 월가와 겨루는 시티오브런던 금융가의 기원이다. 셰익스피어는 ‘베네치아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의 모델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글로브극장에서 내다보이는 템스강 건너에는 ‘런던의 샤일록’이 우글댔다.

런던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이기도 했다. 1215년 존 왕의 실정을 계기로 귀족들이 들고일어나 왕권을 법률로 제한하는 마그나카르타를 제정했다. 영국식 정치 혁명의 출발이었다. 1295년에는 ‘모범 의회’가 소집돼 귀족과 성직자뿐 아니라 시민 대표도 국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민 자유를 확보하려는 투쟁은 이어져 1642년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혁명을 낳았고, 1688년엔 명예혁명이 일어나 의회주의와 입헌군주제가 뿌리내렸다. 이로써 런던은 개인 자유와 법치에 바탕을 둔 의회 민주주의의 상징이 됐다.

14세기 말,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를 써서 ‘영어’를 만들었다. 런던의 한 여관에서 시작하는 이 순례 이야기 덕분에 런던 사투리가 ‘표준 영어’로 자리 잡았다. 한 세기 후, 셰익스피어가 등장해 젠트리 계층의 욕망을 반영한 인간을 무대에 올려 르네상스의 막을 열었다. 중세 내내 상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젠트리는 흑사병, 장미전쟁, 종교개혁을 계기로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 귀족’으로 변신했고, 훗날 자본가 계급으로 성장했다. ‘리어왕’은 탐욕이 사랑을 몰락시키는 비극을 통해서 근대의 출현을 보여준다. “누더기 사이론 티끌만 한 죄도 훤히 드러나지만 화려한 옷과 모피 코트는 모든 죄를 감추어 주는 법.”

이후, 런던은 “바다의 떠돌이 기사”(‘암흑의 핵심’)를 보내 지구의 부를 약탈하는 제국의 전진기지가 됐다. 1588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 드레이크를 등용해서 무적함대를 무찌른 후 대서양 제해권을 장악하고 북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았다. 1600년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향료 전쟁에 뛰어들어 인도양에서 네덜란드와 다투고, 아프리카로 쳐들어가 노예무역을 일으켰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심장답게 런던은 지칠 줄 모르고 세계의 부를 빨아들였다. 존 밀턴은 노래했다. “런던이여, 수 마일 바깥에서도 우뚝 솟은 머리가 보이는 도시여, 그대는 이 세상에 있을 만한 아름다움은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고 있으니, 운 좋다는 말로는 모자라도다!”

더 나은 삶을 찾아 사람들이 몰려왔다. 런던 인구는 100년마다 2배씩 증가했다. 15세기 중반 런던은 인구 7만5000명의 소도시였으나, 16세기 말 25만 명, 17세기 말 50만 명, 18세기 말 100만 명의 대도시로 발달했다. 같은 시기에 면직 공업 발달과 증기기관 발명이 촉발한 산업혁명은 금융시장 발전과 합쳐져 런던의 부를 크게 부풀렸다. 그러나 풍요를 누구나 누리진 못했다. 무역이 흥할수록 이상하게도 빈민들은 더 가난해졌다. 런던은 ‘두 도시’로 쪼개졌다.

이미지 크게보기

먼저, 시티오브런던을 중심으로 공손과 예의로 무장한 부르주아들이 살아가는 세련된 주택 단지가 있었다. 벤 윌슨의 ‘메트로폴리스’에 따르면, 정원·공원·커피숍·강당·박물관·산책로 등을 갖춘 곳이었다. 서점·부티크·향료점·커피점·중국상품점 등이 이들에게 사교 공간을 제공하고, 책·도자기·차·그림 등이 이들의 집을 장식하면서 ‘소비자 혁명’이 일어났다.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디킨스는 ‘제국의 소셜미디어’가 말하지 않는 진실을 봤다. 런던의 스모그 아래엔 진창이 있었다. 디킨스는 빈자의 삶이 ‘검은 이슬비’에 젖어 있다고, 정의 없는 런던 하늘엔 ‘죽은 태양’이 걸려 있다고 은유했다. 불결 말고 다른 삶의 형식을 택할 수 없던 빈민가 ‘쥐의 굴’은 부자 동네 블룸즈버리와 붙어 있었다. 나중에 우울증에 시달리던 버지니아 울프가 친구들과 함께 지적 탐구를 즐기던 곳이었다. 마르크스는 영국도서관에서 노동자 계급이 사는 쓰레기장 같은 소호를 내려다보면서 ‘자본론’을 썼다. 디킨스 말처럼, 런던은 “뒤떨어진 자는 귀신에게 잡아먹히는 곳”이었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성이 작동하는 시대에는 살인과 사기와 절도가 판치는 런던의 범죄들을 셜록 홈스와 브라운 신부가 처리해 냈다. 그러나 합리 너머에서 탄생한 괴물까지 막을 순 없었다. 불평등은 합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두 괴물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을 낳았다.

프랑코 모레티의 ‘공포의 변증법’에 따르면, 피를 빨아 인간을 노예화하는 향락을 즐기는 드라큘라는 자본가의 투영이고, 죽은 자의 뼈를 이어붙여 만든 프랑켄슈타인은 프롤레타리아의 표상이다. 주인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된 괴물은 이름 없이 존재하다 주인 프랑켄슈타인을 살해하고 그 이름을 빼앗는다. “저주받은 창조자여, 왜 당신조차 고개 돌릴 끔찍한 괴물을 만들었는가?” 양극화가 근대적 공포를 생산했다.

공포는 이어서 런던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한다. 런던은 독일군의 공습 이전에 사람들 마음에서 이미 폐허였다. H G 웰스의 ‘우주 전쟁’엔 화성인 침공으로 파괴당한 런던이 묘사된다. 웨스트민스터 구는 누더기가 되고, 세인트폴 대성당의 지붕엔 큰 구멍이 뚫린다. ‘1984’에서 조지 오웰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런던을 ‘빅브러더 도시’로 만든다. 트래펄가 광장은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의 승리 광장이 되고, 런던대는 진리부로, BBC 방송국 회의실은 정치범 고문실 101호로 바뀐다. 고통에 지친 사람들은 차라리 폐허를 열망하고 디스토피아를 꿈꿨다. 이것이 ‘런던의 가을’이었다.

20세기 영국은 제국의 위엄을 상실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은 막대한 부채를 남겼고, 식민지는 차례로 독립했다. 미국에 패권을 넘겨준 영국은 ‘내부 난민’이 진짜 괴물이 되지 않도록 복지국가 체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T 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예감했다. “현실감 없는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사람들 한 떼가 런던교 위를 흘러갔다./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음이 망쳤다고 나는 생각도 못 했다.” 이제 영국의 해는 날마다 떴다가 진다.


■ 용어설명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 : 시티오브런던은 ‘런던 아닌 런던’이다. 로마가 세운 성벽 안에 자리 잡은 이곳은 시장도 런던과 따로 뽑고, 경찰도 별도로 운영하는 자치 지역이다. 11세기 이후, 유대인과 이탈리아인의 정착으로 시작된 시티의 금융 패권은 1571년 왕립거래소, 1691년 로이드 커피하우스,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이 들어서면서 확고해진다. 돈을 좇아 상인이 몰리는 건 불문가지. 시티는 ‘바다의 기사’인 무역 상인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상품을 판매하는 땅이자, ‘황금의 기사’인 금융업자들이 국채, 주식, 보험, 해운 등의 투자수익을 겨루는 장이 됐다. 한때 사방 1마일, 인구 1만 명도 안 되는 시티에서 세계 경제의 운명이 정해졌다. 2008년 금융위기의 진원지로 알려져 위상이 낮아지고, 이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탓에 비상과 추락의 갈림길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