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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철환의 음악동네 - 박창근 ‘그날들’

그만하라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자꾸 생겨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어디 갔다 이제 왔니?” 정확히 말해 그들은 간 게 아니라 온 것이다. 그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멀리 가거나 숨어 있다 나타난 게 아니다. 그들은 바라고 바라보았다. 꾸준히 노렸고 쉼 없이 노래했다. 다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귀에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제작자에게 오디션은 버리기 힘든 유혹이다. 우선 섭외의 부담이 덜하다. 예고만 틀어도 신청자가 몰린다. 보여준 게 많은 스타는 모시기도 까다로운데 보여줄 게 많은 예비스타는 예의마저 충만하다. 시청률이 담보된(그러길 바라는) 스타 캐스팅보다 예측불허의 모험적 스타 메이킹이 실은 보람도 크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은 방송사에서도 쓰던 말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주철환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이야기도 넘쳐난다. 출연자의 구구절절 사연을 이어붙이면 대하소설 몇 편도 나올 거다. 누가 일등 하느냐에만 관심을 둔다면 오디션을 오징어게임으로 간주하는 거다. 힘겹게 살아온 사람이 즐겁게 혹은 처절하게 노래를 부르니 시청자도 가끔은 눈을 감게 된다.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잊고 산 그 무엇을 되살려보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 최근 가수 오디션의 핵심은 되살림이다. 묻힌 재능도 되살리고 꺼진 노래도 되살리고 시청자의 추억도 되살린다. 살다 버린 가치들도 되살려주니 오디션이 부활 축제가 되는 건 당연하다.

출연자와 관객 사이에 마스터라 불리는 심사단이 있다. 그들의 언행 또한 재미의 한 축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공정을 찾아야 하는 그들의 어깨가 무거울 성싶다. ‘내일은 국민가수’(TV조선) 첫 회(10. 7 방송)에서 ‘호랑이 마스터’라는 별칭의 박선주를 울게 만든 장면이 있었다. 노래가 울렸고 가수가 울렸고 기억이 울렸다.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김광석 ‘그날들’ 중). 이때 무대는 숙연했고 심사석은 들썩였다. ‘가수가 감동을 주는 구간은 첫 네 마디에서 결정된다’고 갈파한 김범수의 경험칙은 적중했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그날들’을 선곡한 가수는 무명팀 소속이다. 자막에 박창근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나오는데도 그는 무명팀이었다. 하기야 마스터 석에 앉은 사람 전부가 한때는 무명이었다. 단지 박창근의 무명이 좀 길었을 뿐이다. 오명이 얼룩이라면 무명은 백지다. 50세라곤 믿기지 않는 앳된 얼굴과 연단된 목소리로 그는 30년 묵은 노래(1991년 발표)의 타래를 한올 한올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헤쳐온 사막의 모래였고 23년간 무명으로 살아온 가수의 넋두리였다. 작은 물방울로 시작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폭포수가 돼 감동의 바다로 내리꽂혔다. 최고의 평은 대체로 비슷하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나”. 첫 소절에 8하트가 켜지고 마침내 올 하트에 불이 들어왔다. 그날이 오기까지 그가 겪은 ‘그날들’이 주마등처럼 폭주하는 순간들이었다.

음악동네 사람들은 이리저리 엮여있다. 박선주의 선배 가수 김광석을 둘러싼 세 사람(김창기 임지훈 김창완)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그날들’의 작사 작곡자 김창기는 김광석과 함께 노래한 포크밴드 동물원에서 ‘거리에서’ ‘변해가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등 불후의 명곡들을 쓴 현직 정신과 의사다. 요즘은 보이그룹 비투비의 임현식 아빠로 유명한 임지훈은 산울림 김창완이 프로듀싱한 꾸러기들의 멤버였다. 1987년 ‘사랑의 썰물’로 성공적인 솔로 데뷔를 했는데 이 노래의 작사 작곡자가 또 김창기다. 임지훈은 김광석과 김창기를 김창완에게 소개해 그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주선했다. 기회를 빨리 잡은 사람도 있고 한순간 놓친 사람도 있으며, 그냥 버린 사람도 있다. 바닥을 친다는 걸 끝났다는 말로 오해하면 그건 진짜로 끝이다. 기회는 공처럼 튀어 오른다. 당신의 어두운 ‘그날들’은 찬란한 ‘그날’의 재료다.

작가
프로듀서·노래채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