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규석 ‘기차와 소나무’

스토킹범죄처벌법이 오는 10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뉴스에서 스토킹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영어 제목은 ‘플레이 미스티 포 미(Play Misty For Me)’. ‘미스티’라는 노래를 틀어달라는 얘기다. 재즈피아니스트 에롤 가너가 작곡한 이 발라드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로 유명하다. ‘당신이 가까이 있을 때 나는 흐릿해져요(I get misty the moment you’re near) 당신이 나를 끌어당긴다는 거 모르시나요(Can’t you see that you’re leading me on)’.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본인이 주연(라디오 DJ 역)도 맡았다. 제목만 들으면 로맨스일 것도 같은데 공포 스릴러다. 어느 날 나지막한 목소리의 주인공으로부터 전화신청곡(‘Misty’)을 받았는데 이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 청취자는 ‘미스티’(안개)가 아니라 ‘미저리’(편집광적인 열성팬)였던 것이다. 로버타 플랙의 ‘당신을 처음 본 순간’(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도 이 영화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난 알았죠. 우리의 기쁨이 세상에 가득할 거라고(And I knew our joy would fill the earth) 내 사랑은 영원할 거예요(And last ’till the end of time my love).

섬뜩하지 않은가. 스토킹의 두 가지 요소는 착각과 공감능력 부재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중). 그리고 일방적으로 다짐한다. ‘정녕 난 잊지 않으리/ 순간에서 영원까지’(해오라기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 집착에 가까운 사랑은 비극적인 사건(심지어 구속)이 된 후에야 실체가 드러난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이/ 그렇게도 그대에겐 구속이었소’(구창모 ‘희나리’ 중).

50년 전 영화니까 당연히 휴대전화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때랑 달라진 게 있다면 어둠은 그대로인데 벨소리가 음악소리로 바뀌었다는 거다. 전화를 해 놓고는 ‘방금 내가 들은 벨소리 노래가 뭐야’라고 묻는 친구가 있다. 그럴 땐 노래 제목과 함께 TMI(Too Much Information·과한 정보)도 곁들여 제공한다. “내가 듣는 건 벨소리지만 네가 듣는 건 컬러링이야.” 결론적으로 친구는 신호대기음악이 궁금했던 거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기 전에 그가 선곡한 컬러링을 듣게 되면서 그의 컬러(취향)도 대충은 짐작하게 된다. 처음 듣는 곡인데 음악이 좋을 땐 은근히 늦게 받길 바란 적도 있다. 참고로 지금 내 컬러링은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침묵의 소리)다. ‘어둠이여 내 오랜 친구여(Hello darkness my old friend) 너랑 또 얘기하러 왔다네(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그러니까 내 친구들은 별생각 없이 나를 암흑이라 부르며 나를 또 불러내는 셈이다. 나의 벨소리는 이규석의 ‘기차와 소나무’다. 나른할 때 나를 깨우는 노래다. 개인적으론 영성가요로 분류한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 휴식 같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노랫말 속에 산이 등장하는데 의미가 남다르다. ‘사람들에게 잊혀진 이야기는 산이 되고’. 그렇다. 사람은 흙이 되지만 이야기는 산이 된다. ‘우리들에게 버려진 추억들은 나무 되어’. 아, 사랑은 바닥에 짓밟혀도 추억은 낙엽 대신 나무가 된다.

요즘 곳곳에서 ‘저 좀 봐주세요’라며 깃발을 흔들고 기적소리를 내는데 소나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킨다. 무궁화, 새마을, KTX 등 기차는 세월 따라 이름 따라 가격을 올려도 소나무는 오늘도 그냥 소나무일 뿐이다. 기차는 조그만 간이역에 서지도 않고 휙 지나가 버리지만 ‘키 작은 소나무’는 오늘도 ‘낮은 귀를 열고서 살며시 턱을 고인다’(이규석 ‘기차와 소나무’ 중).

작가·프로듀서 노래채집가

이미지 크게보기 주철환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