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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을순(1915∼2000)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온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 속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혼돈의 연속이었습니다. 딱히 잘난 것 없이 나이만 먹은 복학생은 갈 곳조차 마땅치 않아 동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날도 도서관에서 시답잖은 소설에 빠져 있던 중에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얼른 집으로 와.”

집으로 가는 멀지 않은 길이 너무나도 막막하게 느껴졌습니다. 부모님, 동생들과 함께 시골 할머니 댁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사람들로 마당이 가득했습니다. 그날 저녁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할머니의 꽃상여 앞에서 영정을 들고 가는 저의 머리 위로는 한여름의 빗방울이 시원하게 쏟아졌습니다. 선산으로 향하는 논두렁길 양옆에서는 개구리들이 목청껏 울었습니다. 할머니는 생전 저에게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신 적이 없습니다. 시골집 마당에 놓인 장독간은 언제나 윤기가 흐르고, 4년 전 먼저 떠나신 할아버지의 사랑방에는 먼지 한 톨이 없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살가운 손자가 되지 못했던 어린 손자는 그렇게 청년이 돼 할머니의 영정을 꼭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은 잊히질 않습니다.

어느덧 40대 중반이 된 손자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됐고, 할머니께서 영원히 사랑하신 아버지와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아파트 베란다에도 작은 장독 몇 개를 두었는데, 오래전 시골집에서 장독을 닦던 할머니가 오늘은 아버지의 등 뒤에 업혀 있습니다.

손자 황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