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들

‘이건희 컬렉션’ 기증품 비하인드 스토리

행방몰랐던 이쾌대‘항구’·박수근‘농악’ 등에 미술계 환호
장욱진‘나룻배’ 뒷면엔 ‘소녀’그림… 재료없어 양면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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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컬렉션 중 국가에 기증된 미술품들에 대한 뒷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작가들의 작품 생산과 수집가의 소장 경로 등을 둘러싼 비화들이 미술 전문가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특히 한국 근대미술 작품들에 대한 후문은 미술 마니아가 아닌 이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국현)에 기증된 이중섭의 ‘흰 소’는 1972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이중섭의 첫 유작전에 출품됐던 작품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는데 이번에 나타난 것이다. 역시 국현에 기증된 ‘황소’는 1954년 통영시절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그림만 열심히 그려 팔면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날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황소의 힘찬 울부짖음이 용맹스럽고 열정적이면서도, 왠지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 소리 효과로 인해 먹먹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1990년 금성출판사에서 발간된 이중섭 도록을 비롯해 출판물에는 실려 있었지만, 실물이 공개된 적이 거의 없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된 이중섭의 은지화 3점은 1940년 것이어서 주목을 받는다. 이중섭이 1950년 6·25전쟁 이후 미군이 버린 양담배 은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이번에 일본 유학 시절에도 은지화를 그렸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에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강원 양구 박수근미술관으로 간 박수근의 유화 작품들도 각각 비화를 품고 있다. 195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됐던 ‘한일(閑日)’은 해외에 반출됐다가 지난 2003년 미국 경매에서 낙찰돼 한국으로 돌아온 작품이다. ‘농악’은 1965년 유작전에 나왔으나 그 이후 소장처가 확인이 안 됐던 것이다. ‘아기 업은 소녀’ 연작은 경매시장에도 잘 나오지 않아 돈 주고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이중섭과 박수근이 6·25전쟁 등을 겪으며 가난에 시달렸던 것처럼 장욱진 역시 그랬다는 것이 이번에 새삼 드러났다. 국현으로 간 장욱진의 1951년 작 ‘나룻배’ 뒷면에 또 다른 작품 ‘소녀’가 그려져 있어서다. 전쟁 중에 그림 재료가 부족해 양면에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는 1950년대 작품으로, 서양화에 동양 정서를 담아낸 작가 특유의 화풍이 드러난다. 가로 길이가 6m에 육박하는 대작(281×568㎝)으로 김환기 작품 중 가장 큰 규모로 추정된다. 1980년대 호암미술관 수장고에 들어간 후 밖에 나오지 않았던 작품이다.

전남도립미술관이 맡게 된 천경자의 ‘꽃과 나비’ ‘만선’은 1970년대 동양화라는 장르의 벽을 넘어서고자 실험을 시도한 것들이다. 특히 흙에 물감을 섞어 종이 위에 바른 ‘만선’은 전문가들도 실물을 보지 못했던 작품이다.

이번 기증 목록을 접한 후 미술전문가들이 특히 쾌재를 부른 것은 이쾌대의 ‘항구’가 있어서였다. 이쾌대는 일제강점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화가였으나, 그와 교우했던 문학인 임화, 이태준 등처럼 해방 후 월북하면서 남쪽에서 이름이 사라진 인물이었다. 이번에 대구미술관에 간 ‘항구’는 1960년 작으로, 북한에서의 그의 행적을 알 수 있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북한에 있던 작품이 중국 판매상에게 넘어간 뒤 한국으로 들어와 이건희 회장에게 팔린 것으로 미술계는 보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을 감정했던 윤용철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걸작들을 직접 보는 안복(眼福)을 누린 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삼성가는 그런 해외 걸작들을 기증 목록에 포함시킴으로써 미술계를 흥분시켰다. 미술사학자인 양정무 한국예술종합대 교수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과 함께 오귀스트 르누아르 ‘책 읽는 여인’,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시장’이 함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서양 미술사에서 인상주의 초기를 이끌었던 세 작가의 작품을 우리 국민이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폴 고갱의 작품은 ‘무제’로 알려졌으나, 진짜 제목은 ‘센강 풍경’인데요, 이 작품까지 고려해보면 서양 미술사조를 꿰뚫은 이건희 컬렉션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 교수는 해외 경매시장에서도 10년에 1번 나오는 정도의 작품이 포함된 것과 관련, “고 이 회장이 해외의 권위 있는 아트 딜러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파블로 피카소가 도자기에 그린 작품이 112점 나온 것도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생전 수많은 여자와 염문을 뿌렸던 피카소는 두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여자인 재클린 로케를 만나 도자기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로케는 26세 때 도자기 공방에서 일하던 시절에 72세의 피카소를 만났고 34세 때 80세인 그와 결혼했다. 이런 배경에서 만든 도자기 작품들을 피카소의 유화 작품과 함께 묶어서 보면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것이 미술사학자들의 의견이다.

양 교수는 “이번에 기증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은 서양 풍경화의 걸작이고,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동양 풍경화의 최고작”이라며 “이제 두 작품을 함께 걸어놓고 우리 국민이 감상할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전시를 우리가 최초로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 그의 감격이다.

‘수련이 있는 연못’은 모네가 백내장으로 시력을 점차 잃게 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세계 보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모네의 또 다른 수련 그림은 지난 200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600억 원에 낙찰된 바 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 때 비 온 뒤 안개가 낀 인왕산 일대 풍경을 그린 진경산수화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일컬어진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한국 미술사를 통틀어 최고 작품으로 꼽고 싶다”고 할 정도다. 우리 전통 미술의 아름다움에 천착해 온 전준엽 화백도 “이번 기증품 중에 인왕제색도가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에 빼어난 서예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손재형 선생이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희·홍라희(전 리움미술관장) 부부가 최초로 산 미술품이 손재형의 소장품들이었고, 그중에 인왕제색도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