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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고(故) 이건희 회장 유족들의 기증이 건국 이래 최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평가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봉사·헌신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고인의 이런 유지를 이어받아 이번 기증이 이뤄지게 한 홍라희 여사를 비롯한 유족들에게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오늘 이 아름다운 기증이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비롯됨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선대의 손때가 탁본처럼 선명했던 고향 집과 목가구류들이 늘 그리웠던 호암은 30대 때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집품보다 그 물건으로부터 마음의 기쁨과 기의 조화를 구하고 있다.” 이는 수집 경력이 쌓이고 상당한 안목을 갖춘 후 호암이 한 말이다. 또, “내가 가진 것이 있다면 후손들에게 물려줄 미술품뿐이다”라고도 했다. 미술품에 대한 호암의 확고한 신념을 엿보게 한다.

1976년 가을, 필자는 박물관협회 창립을 논의하기 위해 호암 선생을 찾아뵌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호암은 배석한 이건희 회장(당시 실장)을 지칭하며 “앞으로 미술관은 저 사람이 해 나갈 겁니다”했다. 호암의 유업은 이렇게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로 이어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있다. 이건희 회장에 와서는 그것이 더 확대됐을 뿐 아니라, 우리 것에서 인류문화유산으로까지 그 지평이 넓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대단히 큰 안목과 모범적인 활동이 아닐 수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기증이 확정된 모네, 미로, 달리를 비롯해 샤갈, 피카소, 고갱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의 컬렉션이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과 작가의 연고지가 있는 각 도·시립미술관에 둥지를 틀 김환기·박수근·이중섭·장욱진 등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거나 사료적 가치가 높은 미술품 1600여 점도 이 회장의 업적이다. 대한민국 문화의 격과 폭을 획기적으로 높여준 공헌이다.

이를 포함해 14건의 국보와 보물 46건 등 기증이 결정된 총 2만3000여 점 중 고미술품 2만1600여 점은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한 점 한 점이 민족문화의 정수로, 금전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그야말로 무가지보(無價之寶)다. 또한, 르네상스 때의 메디치가나 페기 구겐하임, 찰스 사치의 예에서 보듯 이번 기증은 사회 공헌과 환원의 가장 성숙한 모델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편, 이 기증이 던져준 숙제도 있다.

첫째, 삼성의 기증품인 모네와 고갱, 미로와 달리 등의 작품으로 컬렉션이 완성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우리 미술관이 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집과 연구 활동이 계속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집 예산의 확충과 이번과 같은 기증이 이어질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지금까지 우리는 지나치리만큼 자국 문화재에만 경도돼 왔다. 이번을 계기 삼아 인류문화유산으로의 인식을 확대해야 한다. 셋째, 이건희 일가의 상속에 따라 상속증여세의 미술품 물납제가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다. 정부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또 다른 이건희가 나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건희 일가가 우리 사회에 준 것은 미술품이 아니다. 그 의미와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에 더 큰 무가지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