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생명의 노래- 서동요, 106×7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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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파리의 日·中 미술 두 거점 - 下

메이지유신이후 미술품 매입
日최초 사설 미술관‘오하라’
세계미술사 거장 작품 즐비

中 르오진자이, 골동상들에게
황실 소장품·보물 등 사들여
40년간 수십만 점 해외 팔아

몇 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서 한·중·일(韓·中·日) 미술에 대해 기념강연을 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나는 중국의 문화를 샘(泉·천)의 문화로, 우리나라 문화를 계곡(溪·계)의 문화로, 일본 문화를 웅덩이(池·지)의 문화로 정의한 바 있다. 한(漢)족의 문자(漢字)가 중국에서 발원해 한반도를 흘러 다시 일본이라는 웅덩이에 고인다는 의미였다. 질의 응답시간에 한 청중이 손을 들어 그 이론이 재밌다며 누가 만든 것이냐고 했다. “바로 나”라고 했더니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교단에서 동아시아 미술론을 강의할 때 나는 거의 40여 년을 이 샘, 계곡, 웅덩이론을 펼쳐 왔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한자며 지필묵, 수묵화 같은 미술의 요소들이 이 경로를 따라 생성, 변화, 굴절, 수용의 단계로 진행돼간 것이다.

샘의 물은 흘러 계곡을 이루고 그 땅의 토양과 자양을 보태며 웅덩이로 모여든다. 우리가 그 풍부한 문화유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담아낼 기(器)로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몇백 개 될까 말까 한 것에 비해 일본은 이미 미술관 1만 개, 박물관 7000개를 훌쩍 넘어섰다는 것은 그 나라가 자국의 미술뿐 아니라 인접 미술까지 합법, 불법을 총동원해 담아내고 보관하기에 진력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일본의 미술품 끌어모으기는 유명해서 중국의 미술품 퍼 나르기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로는 동아시아를 넘어 유럽 미술품 수집에까지 열을 올리는데 혹자는 이를 자국 미술의 정체성이 약한 문화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혹평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기로서의 역할만은 충분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발길에 채는 기와 조각 하나도 문화재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은 그 보전에 소홀해 사방으로 흘러나갔다.

물론 일본도 전후 맥아더 통치 기간에 상당한 미술품이 미국으로 옮겨갔고 보스턴 미술관 등의 일본 미술 소장품은 그렇게 이뤄진 것이기는 하나 중국과는 그 정도가 달랐다. 사실 일본의 서화골동 수집 역사는 길고 오래된 것이었다. 근대 국가로 성립되기 전 일본은 여러 명의 다이묘(大名)가 분할 통치한 무사의 나라였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일본의 그러한 정체성을 잘 대변해 신고전이 됐는데, 무강(武强)의 무사일수록 문(文)의 콤플렉스를 서화골동의 교양으로 메우려 했던 것이다. 정통 황실 계보가 아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칼보다 붓으로 정통성을 과시하려 했고 엄청난 소장품으로 그런 내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 전통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도 이어져 내려왔는데 두 사람은 우리에게는 원수지만 이토는 간사이(關西) 지방의 최고 서화 소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데라우치 역시 무장이면서 서예가로도 그 이름을 높였다. 중국은 어떤가. 한족이 왕조를 세울 때면 늘 문치(文治)를 표방했는데 그들의 중화(中華)란 말 속에는 “세계의 중심인 중국 문화가 화려하게 꽃핀다”는 오만함이 있다. 이러다 보니 때로는 문약(文弱)에 빠져 이족(異族)의 침공을 받곤 했다. 더구나 나라가 쇠망하게 되면 문화재의 수난도 함께 따라오게 돼 청일 전쟁에 지고 연이어 2차 대전에 짓밟히며, 구미 열강의 지배와 수탈에 시달리는 혼란기에 중국의 문화유산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은 역사적 귀결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르오진자이(盧芹齋), 그는 실로 다양한 루트를 통해 서방세계에 중국 명품들을 퍼 날랐다.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해 골동품상들로부터 사들인 황실 소장품들과 국가, 박물관 및 관료와 거부 소유의 문화재들이 마피아 조직의 수뇌와 같았던 그의 손안으로 속속 몰려들었고 그렇게 수집된 서화, 자기, 고옥(古玉) 등 희대의 보물들이 미국과 유럽에 헐값으로 팔려나갔던 것이다. 어떤 글은 당시 그를 통해 매매된 것 중 보물 중의 보물이라는 흑지소삼채자기(黑地素三彩瓷器)가 2000달러라는 헐값에 거래됐을 정도였다고 전해준다. 그는 이런 식으로 40여 년에 걸쳐 수십만 점에 달하는 중국 문화재를 서방세계에 반출했다고 했다. 자신의 조국이 내우외환으로 할퀴어지고 찢기는 동안 쉴새 없이 빼돌렸다. 그런 그가 서방세계에서는 최고의 중국 전문 고고학자로 알려지면서 사교계의 주요인물로 군림했던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14세기 불교 벽화나 보스턴 미술관의 용문석굴 석사자 등이 그가 판매한 작품이라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흘러나간 문화재 일부는 여러 나라의 국공립 혹은 대학의 박물관, 미술관에 소장됨으로써 중국문화를 알리는 데 그가 기여했다는 시각도 있다.

일본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근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나면서부터 앞다퉈 외국 미술품 사들이기에 나서 한때는 전체 인상파 작품의 10% 이상이 일본에 가 있다는 설이 생겨날 정도였다. 오카야마(岡山)현 구라시키(倉敷)에 있는 일본 최초의 사설 미술관인 오하라 미술관에만 가도 그 지역 소상공인이었던 오하라 마구사부로(大原孫三郞)가 이미 1920년대에 바로크시대 미술품부터 고갱, 모네, 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로댕 등에 이르기까지 세계미술사를 수놓을 거장들의 작품을 끌어모았을 정도였다.

이에 반해 중국은 뒤늦게 문혁(문화혁명) 때 내쳤던 치바이스(1860∼1957) 등을 추켜세우며 피카소와 가격 경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걸작들은 이미 거의 모든 작품이 일본인 소장으로 돼 있었다. 우리 고려 불화의 경우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한번 흘러나간 것을 다시 끌어모으기가 쉽지 않게 돼버린 것이다.

부국(富國)은 모든 나라의 꿈이고 목표다. 그러나 진정한 부자나라는 문화유산을 잘 보전하고 후손에게 그 광휘를 전해 줄줄 아는 나라일 것이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