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780년대에 서울 명례방에서 이벽(하늘색 옷 입은 이)과 천주교 신자들이 예배 모임을 하는 장면. 김태 화백 작. 명동대성당 소장

■ 천주교주교회의, 이벽·이승훈·황사영 등 133명 ‘시복’ 심사 완료

이벽·이승훈 그동안 ‘배교’ 논란
황사영은 백서 탓에 ‘매국’ 혐의
추가 조사·연구 등 필요 이유로
국내 교계서 장기간 심사해와

이벽(李檗·1754∼1785), 이승훈(李承薰·1756∼1801), 황사영(黃嗣永·1775∼1801).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인 이들 세 사람이 국내 교계에서 ‘순교자’ 지위를 공식적으로 얻었다. 그동안 순교 증거가 불확실하고 배교(背敎), 매국(賣國) 논란이 있어서 미뤄 왔던 복자(福者) 추천을 교황청 시성성에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25일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諡福) 안건의 예비심사 법정 회기를 종료했다. 지난 2017년 2월부터 33회기가 열린 교회법정 심사는 조선 왕조 시기인 1785∼1879년 박해로 죽임을 당한 천주교인 133명을 시복하기 위한 것이다. 시복은 교회가 공경할 복자로 선포하는 일을 말한다. 천주교 성인으로 추대하는 시성(諡聖)과 같은 맥락이다. 성인은 세계 교회 어디서나 공적으로 공경할 수 있고, 복자는 특정 교구와 지역, 국가 안에서 한정적으로 공경한다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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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는 1984년 시성식, 2011년 시복식을 통해 103위 성인과 123위 복자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 천주교 역사 맨 앞을 연 이벽, 이승훈, 황사영은 빠졌다. 국내 교계에서 추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벽은 아버지 반대에 부닥쳐 동료 교인들과 연락을 끊은 것과 관련해 배교했다는 설과 효(孝)를 위해 물러서는 척했을 뿐이라는 의견이 대립해왔다. 남인 계열의 유학자였던 그는 청년 시기에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며 천주교를 믿게 됐다. 경기 광주의 천진암(天眞庵) 강학회 등을 통해 당대 학자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함으로써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신앙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1784년 이승훈에게 중국 사신으로 가는 부친을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서 세례를 받아올 것을 부탁했고,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그에게서 영세를 받아 정식으로 신자가 됐다.

이후 남인 계열 학자인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과 중인 김범우(金範禹) 등도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됐다. 이들은 명례방(明禮坊·현재 명동대성당)에서 천주교 모임을 열곤 했는데,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세상에 드러나 큰 타격을 받았다. 그 후 이벽은 아버지로부터 “네가 믿으면 나는 죽겠다”는 식의 반대를 받았고, 가족에 의해 외딴 방에 갇혀 지내다가 요절했다.

이번에 주교회의는 이벽을 복자로 추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국 천주교 초기를 이끈 그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선교사 전도가 아닌 자생적으로 신앙 공동체가 생긴 것은 한국 천주교가 유일하다.

조선 최초 세례 교인이었던 이승훈은 정약용 누나의 남편이었다. 베드로가 세례명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와 당파 싸움 등에 휘말려 신앙을 버리겠다고 세 차례 공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신유박해(1801·순조 1년) 때는 물러서지 않고 천주교인으로서 죽었다. 그동안 그의 배교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이번에 시복됨으로써 순교자로서의 모습에 더 방점이 찍히게 됐다.

황사영은 만 15세에 과거에 급제했을 때 정조가 손을 잡고 격려했을 정도로 유망한 문사였다. 정약용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과 혼인한 그는 처삼촌인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신해박해(1791·정조 15년) 와중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며 서울 지역 지도자로 활약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해 은거하면서 베이징 주교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다. 이 백서가 발각되면서 그는 서울로 압송돼 대역죄로 처형됐다. 황사영이 명백히 순교했음에도 시복이 미뤄진 것은 백서 내용이 매국 혐의를 받았던 탓이다. 청나라 황제에게 청해 조선 천주교를 합법화시키고, 그게 통하지 않을 경우에 서양 군대를 보내달라고 한 내용이 문제가 됐다.

주교회의는 지난 2013년 황사영 관련 심포지엄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천주교 법정 심사까지 거치며 이 논란을 오랫동안 심도 있게 검증해왔다. 매국 행위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당시 폭정에 시달리던 조선 백성을 구하기 위한 신앙적 결단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됐다. 시복 청원인 자격으로 참여한 김종강 신부는 “역사적 논란은 남아있지만, 그분들이 조선이라는 사회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백성의 삶을 돌아보고 신앙을 통해 조선을 바꾸려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삶이 참된 것임에 굽히지 않는 용기를 보여줬던 점에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