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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 문화부 선임기자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이 펴낸 책 이름이다. 그는 이 책에 미국 유명 미술관들에 대한 기업인들의 기부·후원 이야기를 담았다. 경제학자가 미술관 이야기를 했으니 그 자체가 ‘외도’인 셈인데, 밀도 있는 내용으로 미술 마니아임을 과시했다. 그런데 그는 책 곳곳에서 한국 기업인들은 사회 공헌 의지가 없다고 반복적으로 비판했다. 그가 책을 출간할 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대표였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한국의 슈퍼리치, 그러니까 큰 부자들에게 손가락질한다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국제 미술장터 아트바젤의 ‘2021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컬렉터 61%는 전체 자산의 10% 이상을 미술품으로 운용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컬렉션은 그 표준인 셈이다. 시가 감정 총액이 2조∼3조 원에 달한다면, 유산의 10∼15%가 되니.

문화 선진국들은 자산가들 소장품을 미술관으로 끌어와 국민이 함께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왔다. 그 방안의 하나가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대신 낼 수 있는 물납제이다. 그것을 통해 프랑스는 피카소 미술관을 지었다. 또 하나는, 기증·기부를 하면 조세 혜택을 주는 것이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품이 대부분 기증품인 것은 그 덕분이다. 제도 유인이 자산가의 선심(善心)과 결합한 것이다.

“삼성가(家)에서 이건희 회장 컬렉션을 통 크게 기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공감한다. 진귀한 문화재와 세계 명화가 즐비한 ‘이건희 미술관’이 있다면 세계에 자랑할 수 있을 듯싶다. 그러나 그걸 요구하기엔 염치가 없다. 개인이 심혈을 기울여 40여 년간 모아 온 사적 자산을 공적 공간으로 가져올 만한 제도가 너무 미흡한 것이다. 문화계가 10년 전부터 주장했던 물납제와 조세 혜택 방안을 실효성 있게 마련했어야 했다.

우리나라 미술거래액은 2019년 기준 4147억 원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1점 값(4971억 원 경매)에도 못 미친다. 미술관 전체의 미술품 구입은 200억 원대이다. 선진국처럼 미술관에서 일상적으로 명작을 보는 걸 꿈꿀 처지가 못 된다.

정부는 문화 선진국을 지향한다면서 제도 마련에 게을렀고, 국회는 눈 감고 있었다.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작년에 관련 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기획재정위 전체 회의에 상정도 안 된 상태이다. 내달까지 상속세 납부안을 신고해야 하는 삼성가 컬렉션이 개정법 적용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도 경실련은 성명을 통해 물납제 논의가 ‘삼성 봐 주기’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문화계가 10년 전부터 주장해 온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일단 때리기부터 하는 것이다. 대기업을 공적(公敵)으로 몰아서 내 편 표심을 모아 온 정치권력 행태와 다름없다.

대기업 경영에 부정이 없도록 감시하는 것은 공익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무조건 손가락질을 함으로써 사회 공헌 의욕을 꺾으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이다. 슈퍼리치의 ‘미술 외도’를 권하려면, 인식 전환과 함께 관련 제도 마련에 적극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