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고소인이 젊은 여자였으면 그 사람이 구속됐을까요?”

69세 노인인 효정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9살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고민 끝에 경찰에 신고하지만, 고령자라는 이유만으로 효정의 진술은 신빙성을 의심받습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69세’는 성폭력 문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 여성을 다뤘는데요.

“젊은 남자가 설마”, “(피해자가) 치매인 것 아니냐” 등 노인 성폭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을 담았죠.

이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난달 22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마을 이장 박모 씨로부터 5년간 성폭행을 당했다는 85세 노인의 사연이 소개됐습니다.

할머니의 자녀들이 설치해둔 CCTV에는 박씨의 행동이 고스란히 담겼는데요.

모르쇠로 일관하던 박씨는 CCTV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본인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할머니 딸은 말했죠.

하지만 박 씨는 이내 입장을 번복했습니다.

할머니가 고령과 질환으로 몸이 불편해 저항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자 박씨는 “할머니가 뒤늦게 이러는 건 돈 때문”이라고 반박한 건데요.

할머니는 박씨를 고소했지만 사건은 불기소 처분됐습니다.

증거로 제출한 CCTV 화면에 피해자가 저항하는 모습이 명확히 담기지 않았고 할머니의 진술 과정에 자녀가 개입해 진술이 오염됐다는 게 그 이유였죠.

할머니는 결국 60년 넘게 살았던 마을을 떠난다고 밝혔는데요.

방송 이후 피해자를 구제하지 못하는 법을 바꿔 달라며 재수사를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등장했습니다.

사실 여부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노인 성범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런 지적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60세 초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은 3천 건을 넘었고, 매년 증가하는 추세죠.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노인 성범죄는 우리 사회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일종의 소외당한 영역”이라며 “노인들은 성범죄 피해를 문제화하는 것에 두려움, 수치심을 느껴 최대한 감추려고 한다. 통계적으로 노인 대상 성범죄가 증가하고 있지만, 공론화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노인을 성범죄와 무관한 존재로 인식하는 부족한 성 인지 감수성도 피해 사실 공론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오윤성 교수는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것과 더불어 해당 범죄를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노인 대상 성범죄도 결국 약자에 대한 폭력인 만큼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는 견해도 나옵니다.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대표 변호사는 “형량을 올린다고 해서 사건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며 “피해자 보호는 물론 전문 수사관과 판사가 사건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수사하고 판결하는 문제가 구조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피해자가 숨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려면 먼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연합뉴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