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가 지난 11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외교개혁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 위성락 前 주러대사

정파·이념 수렁에 빠진 韓 외교
美-中 사이서 오락가락 정책 펴
정권 바뀌더라도 기준따라 이행
전략·국익 중심 ‘정책믹스’ 필요

사드문제 등서 자주권 안지키면
中이라는 자기장에 끌려가게 돼

바이든도 트럼프정책 다 못버려
美 새 정권, 동맹에 요구 많을 것

“정책과 전략, 국익으로 가자.”

한국 외교의 대표적 전략가로 손꼽히는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가 내놓은 우리 외교의 지향점이다. 위 전 대사가 이런 방향을 제시한 이유는 그가 최근 펴낸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외교가 ‘5대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수렁은 외교 사안의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 관점, 국내 정치 위주 관점, 이념적·당파적 관점, 포퓰리즘, 아마추어리즘이다. 이런 생태계 위에서 활동하는 ‘6대 행위자(집권 엘리트, 관료, 정치권, 언론, 학계, 시민사회단체)’도 선진적이지 못하다 보니 ‘내재적 취약점’을 갖게 됐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난 70년, 길게는 100여 년 동안의 역사가 중첩된 결과물이라는 것이 위 전 대사의 분석이다. ‘5대 수렁’은 특정 정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강조했다. 지난 11일 문화일보 편집국에서 위 전 대사를 만나 그가 제시한 ‘외교개혁’의 방향과 북핵, 4강 외교 등 현안에 대해 인터뷰했다.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뭔가.

“대한민국 외교를 성찰해보자. 우리가 왜 현재 외교의 모습과 수준을 갖게 됐나 하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70년의 성찰이고, 조금 더 나가면 19세기 후반 근대 서양 외교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지금까지 100여 년에 대한 성찰이다. 한반도 안보 구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중차대한 변혁들이 미·중, 미·러 관계가 최악인 상황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순간에도 이에 대처하는 한국 외교는 여전히 내재적 취약점에 기인한 문제를 드러냈다. 특히 우리나라는 정파나 이념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정책과 전략, 국익을 지향하는 외교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외교 생태계’가 바로 잡혀야 올바른 담론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올바른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던 상황을 예로 들면 어떤 게 있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의 구도에서 이 문제는 논의하면 할수록 합리적인 해법을 찾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회피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관료들의 보신주의도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한국은 지난 100여 년간 나라를 잃고 전쟁을 겪고 분단되는 등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 그 기간이 처음으로 중국과 끊어져서 산 100여 년이다. 그사이 우리는 중국이 아닌 초강대국과 동맹이 됐다. 그 상황에서 경제 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이뤘다. 그렇게 떨어져 살다가 1992년에 한·중이 다시 만났다. 그동안 우리 정체성이 과거 수천 년과 완전히 달라졌다. 일본은 더 이상 우리의 자주권을 침탈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인디펜던스(independence·독립)’와 ‘서버린티(sovereignty·자주권)’를 중국과 타협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논의가 한국 외교를 끌고 가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논의는 피하고 편한 구호, 예컨대 연미화중(聯美和中·미국과 연대하고 중국과 친화해야 한다) 같은 원론적인 말로 방략을 세울 순 없다.”

우리나라가 한 번이라도 사드 문제를 이 같은 큰 통시적(通時的) 흐름에서 논의해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번 책에서도 “과거 오랜 기간 중화질서 속에서 살아온 우리 스스로가 자주권을 지키려 하지 않으면 부지불식 간에 중국이라는 막강한 자기장 속으로 끌려가기 쉽다”고 언급했다.

―사드 문제, 미·중 갈등 이슈에서 하이브리드식 접근을 하면 미국의 요구(3시 방향)와 중국의 요구(9시 방향) 사이를 오가는 정책 선택을 하게 된다고 책에 적었는데.

“기준 좌표를 잡아놓고 프랙티스(practice·이행)하면서 관례를 축적해 모두가 알게 각인시켜야 한다. 예컨대 ‘한국에 진보정부가 들어서면 1시, 보수정부가 들어서면 1시 반’이라는 식으로 관례를 축적하는 것이 좋다. 이런 것들을 말로 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런 기준을 계속 유지하면 된다. ‘일본은 2시, 호주는 2시 반’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려면 우리 내부적으로 생각의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은 한국이 미국의 동맹이란 걸 알면서도 한국을 흔들고 있다.

“사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처하는 한국의 아주 중대한 안보 이슈다. 이미 20년 전부터 제기됐는데,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 이슈처럼 대응해왔다. 그렇게 대처하는 동안 어느 순간 미국이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됐다. 그러니까 중국이 ‘그건 미국이 우리를 견제하려고 하는 거니까 허가하지 말라’고 하게 된 것이다.”

―책에서도 한국 외교의 ‘6대 행위자’의 행태와 구조적 문제를 언급했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분법적 사고와 프레임이 우리 외교의 외연을 좁히고 있는 것 같다.

“가령 보수진영은 동맹·국제주의, 진보진영은 자주·민족·남북·친중 등 한국 외교 발전을 디자인하려면 이분법적 대립이 아닌 통합이 돼야 한다. 그 배합률이 예컨대 보수정권에서는 6대 4, 진보정권에선 4대 6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만 택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것은 맞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번갈아 집권하지만 외교 정책이 확 달라지지 않는다. 비슷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섞이는 비율이 조금 다를 뿐이다. 우리는 이념 당파성이 강하다 보니 다 버리고 하나만 갖고 가는데, 그 또한 한국 외교를 위해서 건전하지 않다고 본다. 남북관계도 중요하고 동맹도 중요하다. ‘정책 믹스(mix)’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달렸다.”

이미지 크게보기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가 최근 출간한 책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

―정책 믹스를 언급하니 조 바이든 미국 정부가 트럼프의 대북 정책이나 한반도 정책을 모두 버릴지 궁금하다.

“미국의 북핵 협상 방식에 있어 톱다운(하향식)이냐 보텀업(상향식)이냐도 결국 정책 믹스의 문제다. 미·북 싱가포르 회담 때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의사결정을 했지만 하노이 회담에서는 뒤집혔다. 트럼프가 힘이 없어서 뒤집힌 게 아니다. 국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다 보니 조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트럼프를 반대하는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 ‘톱다운을 버리지 말라. 그것도 유용성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테니스를 예로 들면 백핸드(backhand)와 포핸드(forehand)로 모두 잘 칠 수 있어야 한다. 30여 년의 북핵 역사에서 정상들 간에 이뤄진 정치적 결단과 담대함을 좋은 유산으로 생각해야 한다.”

―현 정부는 바이든 정부와 어떻게 접점을 찾아 나갈 수 있을까.

“트럼프 정부와 비교해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 불가능한 데다 동맹을 중시하지 않고 혼자 일방적으로 하려고 해서 부담스러웠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이든 정부가 들어선 것은 한·미 관계를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트럼프는 동맹을 중시하지 않으면서 동맹 상대에도 그렇게 정교한 공조를 강요하지 않았는데 바이든은 이와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바이든 시대에는 동맹에 요구사항이 많을 수 있다.”

위 전 대사는 한·미 관계 설정을 바이든 측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의 입장은 ‘불변’으로 두고 한국식 접근을 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 또한 그가 지적한 수렁 가운데 하나인 자기중심적인 관점에 해당한다.

―북한은 바이든 정부 출범에 아직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는데, 도발로 관심 끌기에 나설까.

“현재 국면에서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으로선 바이든 정부와 새 게임을 준비하려면 스타팅 포인트로 도발 단추를 눌러야 할 수 있다. 북한이 도발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와 압박으로 이어지고 대결과 긴장이 고조된다. 길면 1년도 갈 수 있다. 따라서 도발을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바이든 정부 사람들도 초기부터 대화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도발을 저지하고 대화의 장을 여는 쪽으로 움직이는 데 방점을 둬야 한다고 본다.”

―일본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가장 큰 걸림돌인 강제징용 문제만 해도 일본에서는 우리가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하고, 우리 정부도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어 참 답답한데.

“한·일 관계는 우리 정부의 구상처럼 도쿄(東京)올림픽을 활용하는 아이디어가 나름 의미가 있다. 동북아 평화 화해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되니 좋다고는 본다. 다만 그것과 징용 문제가 바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려면 징용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지금까지 움직임을 보면, 우리 쪽에서 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해법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모든 정황을 감안해 ‘현인회의’를 만들어 해법을 의뢰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보수와 진보 초당적인 회의체를 구성해 거기서 나온 결론을 존중하면 양쪽 정부에 큰 부담이 없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방승배 기자 bs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