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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가의 열두 달

한 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가을꽃과 단풍이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가드너에게 11월은 가장 바쁜 달 중의 하나다. (사실 가드너에게 바쁘지 않은 달은 없다.) 벌써 여러 차례 서리를 맞고 시들어 가는 식물들을 정리하고 월동 준비를 시작한다. 내년 봄을 위해 미리 알뿌리를 심어 놓고 여러 종묘회사에서 보내온 카탈로그를 검토하며 내년 한 해 동안 정원에 심을 품종들의 목록을 정리한다. 무엇보다 11월은 땅을 갈고 토양을 준비하기 가장 좋은 때다.

힘들고 고단한 시간을 웃음과 위트, 감동과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고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고마운 책이 있다.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카렐 차페크의 에세이 ‘정원가의 열두 달’이다. 이 책은 1929년 출판된 후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정원 애호가가 첫손에 꼽는 고전이다. 책 속에서 카렐 차페크는 11월을 맞은 정원가에게 흙의 중요성과 삽질의 고귀함에 대해 말한다. “11월은 흙을 위한 달, 흙을 갈아엎고 일구는 달. 삽 한가득 흙을 퍼 올릴 때면 마치 맛난 음식을 한 숟갈 떠올릴 때처럼 입에 군침이 돌며 행복한 기분이 든다”고 예찬한다.

새롭게 흙을 일구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정원사의 눈에 11월의 정원은 결코 겨울잠에 드는 죽음의 정원이 아니다. 식물들은 잎을 떨어트리지만 다음 봄에 피울 꽃과 잎을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새로운 싹 눈과 뿌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자연에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겨울잠에 든다는 표현도 사실 틀린 말이다. 그저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들어설 뿐. 생명이란 영원한 것. 섣불리 끝을 가늠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려보라.” 우리 삶을 치유하는 가드닝의 진정한 가치가 여기에 있다. 즉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새로운 희망과 생명력으로 움트기 시작하는 나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내면의 모습을 발견한다. 건강한 흙 속에서 많은 씨앗이 비밀스럽게 싹을 틔우듯 우리 내면에도 미래를 위한 비밀스럽고도 분주한 몸짓이 늘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잘 보지 못하고 쉽게 우울해 하며 불신하는 데 있다.

때때로 힘들고 고된 일상에서 정원 일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해 주고 한없는 즐거움과 낙천적 힘을 준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 내가 하는 일이 참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는 작가의 말이 오늘도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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