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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첫째, 이레이징(erasing), 둘째 디가우징(degaussing), 셋째, 망치로 깨라.’

지난 2006년 노무현 정부 때 국가정보원에 파일을 완전히 삭제하라는 내부 지침이 있었다고 한다. 수사 등에 대비해 자료를 없애는 방법을 제시한 것인데 요즘은 워낙 복구 기술이 좋아져 하드디스크의 경우 망치로 깨도 복구할 수 있기 때문에 아예 용광로에 넣어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레이징은 초보적인 삭제 방법이다. 파일을 삭제하고 휴지통에 넣은 뒤 이를 비우면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보다 세련된 방법이 디가우징 방식. 지난 2012년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사건이 터졌을 때 이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강력한 자기장을 이용해 파일을 지우는 것으로 거의 복구가 불가능하다. 당시 불법 사찰을 폭로했던 장진수 전 총리실 주무관은 증거 은폐 지시를 받고 한 보안업체를 찾아가 디가우징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순식간에 가능하고 효율적이어서 부처마다 디가우징 장비를 갖췄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디지털 발자국(Digital Footprint) 흔적을 없애주는 ‘디지털 장의사’들도 성업 중이다. 역으로 수사기관들은 초동수사 때 스마트폰을 압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감사원의 월성 1호기 감사에 대비하기 위해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2019년 12월 1일 한밤중에 청사에서 자료를 대거 삭제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장이 직원들에게 컴퓨터는 물론 이메일이나 휴대전화 등에서 자료를 삭제하라고 지시했고 파일 444개가 삭제됐다고 한다. 처음엔 주로 파일의 제목을 수정해 다시 저장한 후 삭제하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이럴 경우 파일을 찾아내도 제목이 다르기 때문에 놓치기 십상이다. 워낙 파기해야 할 자료가 많다 보니 PC의 단순 삭제 기능(delete)을 이용했고, 이마저도 시간이 오래 걸리자 폴더 자체를 삭제했다. 그러나 감사원은 444개 파일 중 포렌식을 통해 324개는 복구했지만, 나머지 120개는 끝내 복구하지 못했다.

산업부는 정부 수립과 함께 상공부로 출범해 동력자원부, 통상산업부, 산업자원부, 지식경제부 등으로 유전(流轉)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산업화 정책을 이끈 자랑스러운 정부 기관이다. 그런데 이번에 산업 진흥이 아니라 ‘삭제 진흥’에 나선 범죄의 소굴처럼 되고 말았다.